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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가을은 늙지 않는다

가을은 늙지 않는다

 

오광수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가을저녁 마음을 다쳐 끝내 몸살이다

까치밥으로 남은 홍시 하나

늑골 근처서 달랑거리다 툭,

온몸 적시며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가을은 하필 늙지도 않고 찾아와서

내 낡은 관절을 쑤시며 콕,

첫사랑을 배신한 죄를 묻는가


모과향 나던 젖가슴을 가진 여자가

마른 기침으로 찾아온 새벽

거봐라 하며 지나가던 가을이

아직 푸른 처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콱,

붉디 붉은 단풍들로 숨이 막힌다


절정에 오른 나무들이 얼굴 붉히며

흰눈 같은 혁명을 기다리는 새벽

늙지도 않는 가을 때문에

마음 다친 사내가

폭설에 갇혀 길을 잃는다


젊은 가을 때문에 사무치면 지는 거라고

비루한 몸들이 소리치지만

속 빨간 단풍을 어찌할 수 없다

어느새 흰눈이 머리를 덮고

첫사랑의 화인(火印)도 천천히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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