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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결혼식 축시의 어떤 예

결혼식 축시의 어떤 예

 

 

 

 

 

이렇게 좋은 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가을 하늘을 떠돌던 두 개의 별이 만나

초저녁 달빛 사이로 빛나는 이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참 먼 길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개나리는 수 없이 피고 지고,

단풍잎은 또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요

몇 천의 붉을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는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시작된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는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렇게 진득한 사랑을 시작했으니

모닥불처럼 타오르다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폭풍우처럼 밀려와 나무를 뽑는 그런 사랑 말고

시골집 안방에 놓인 화로처럼 은근하고도 뜨거운 사랑

막 쪄낸 콩고물에 무친 인절미처럼 쫀득한 사랑

오늘, 사랑은 궁상각치우로 시작됩니다

 

온통 가을로 차고 넘치는 오늘

둘이서 써 내린 사랑이 너무 눈부셔서

은행잎도 질투하며 노랗게 물들어갑니다

견우와 직녀처럼,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저리 아름답게 마주 선 그대들이여

다시는 그 손 놓지 마시지요

 

그 뜨거운 사랑으로 불을 지펴서

섣달 그믐 어두운 밤 환히 밝히고

그 뜨거운 사랑으로 얼음을 녹여서

세상 속으로 시원하게 흘러 가시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날, 좋아서 눈물도 나는 날

기어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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