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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똑 군, 페북 양

다시 ‘우상의 시대’에 서서

‘하나, 하나! 왼발, 왼발! 오와 열, 오와 열!…중략…그는 반평생을 연병장 아니면 운동장에서 보낸 사나이답게 군중을 휘어잡는 재간을 터득하여 비상금처럼 휴대하고 다녔다.’

70년대 발표된 소설가 윤흥길의 단편 ‘제식훈련변천약사(諸式訓練變遷略史)’는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1급 정교사 강습을 받게 된 중·고교 체육교사들의 제식훈련을 소재로 당대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수작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연히 이 작품을 다시 읽다가 고교 시절 제식훈련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에 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오와 열’이 생명인 제식훈련은 물론 총검술 16개 동작, M1소총 분해와 조립 등 일찌감치 ‘군대맛’을 봐야 했다. 그 시절에는 매년 6·25에 맞춰 각 학교 대항 교련실기대회를 개최했다. 실기대회가 다가오면 매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련선생의 지도하에 일사불란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하고, 정확한 총검술과 신속한 소총 분해조립을 연습해야 했다.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훈련이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교련선생의 ‘매타작’ 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그 무렵 고인이 된 박목월과 박두진 시인의 문학강연회가 내가 살던 도시에서 열렸다. 문예반 친구들끼리 강연회에 가기로 한 날, 교련선생은 오와 열이 제대로 맞을 때까지 훈련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나는 교련선생 앞으로 나가서 ‘강연을 들어야 하니 문예반 친구들을 훈련에서 열외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 대답으로 돌아온 건 교련선생의 2단옆차기와 험악한 욕설이었다. “이 빨갱이 같은 놈. 너 같은 녀석은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도망갈 놈이야.”

70년대 고교 제식훈련의 추억

결과적으로는 그날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국어선생님의 중재 끝에 퉁퉁 부은 얼굴로 문학강연회를 들었다. 총검술과 구호가 난무하던 운동장을 벗어나 강나루 건너 밀밭길로 여행을 떠났지만 통증 때문에 행복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살면서 수많은 교련선생의 분신들을 만나야 했지만, 80년대 독재에 항거한 투사들 덕분에 교련선생들의 분신은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국민들에게 마구잡이로 ‘오와 열’을 강요하던 파시즘적인 사회적 분위기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오늘, 남과 북은 국민들의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다니는 기막힌 시대를 다시 맞았다. 이명박 정권 탄생 이후 민주화 퇴행과 남북경색을 지켜보면서 ‘파시즘 초기증세’라고 비판하셨던 영원한 언론인 리영희 선생마저도 ‘하 수상한’ 시절에 별세하셨다. 그분의 우려처럼 국민들에게 ‘오와 열’을 맞춰 줄서기를 강요해온 ‘얼치기 보수세력’들은 민족의 화해와 협력에 의한 평화통일 원칙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대신 학생들의 안보교육 강화와 전 국민의 대피훈련을 부활시켰다. 수십년 동안 째각거리면서 앞으로 전진하던 역사의 시계바늘이 어느날부터 뒤로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사이 생활고에 고통 받아오던 이 땅의 서민들은 전쟁의 공포라는 새로운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됐다.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찜질방을 전전하고, 군대간 아들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뉴스속보가 나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게 됐다. 군미필자인 집권세력들이 군복을 입고 지하벙커와 피해현장을 누비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말들 때문에 가슴 졸이게 됐다. 한민족의 통일에 대해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강대국들은 화약고가 된 한반도 판세를 분석하면서 자국이 얻을 수 있는 이권 리스트 챙기기에 급급하다.

슬그머니 얼굴 내민 야만과 폭력

‘우리나라에는 이 시각에도 전쟁을 원하는 세력과 개인들이 있는 것 같다. 전쟁을 바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도 몰상식적이고 무책임할 수 있을까 싶은 말과 글이 요새 사회와 정부의 언론기관을 주름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리영희 선생께서 94년 쓰신 글이 마치 오늘의 얘기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진실을 억압하고 맹목을 강요하는 ‘우상’과 맞서 싸우느라 한평생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싸워온 리영희 선생의 실천적 삶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또다시 작가들이 ‘제식훈련변천약사’ 후편을 써야 하는 시대를 맞을 것인가. 우리 아이들이 왼발이 나갈 때 오른발을 내디뎠다고 이단옆차기를 당하지 않게 하려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 야만과 폭력에 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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