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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똑 군, 페북 양

K형, 곧 겨울입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 폐사지처럼 산다 /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 (중략) /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 폐사지처럼 산다’(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일부)

K형. 시인 정호승의 신작 시집 <밥값>을 읽다가 시편마다 뚝뚝 묻어나는 비애와 상처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정말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기도 힘든 요즘입니다. 특히 이 나라 중장년들의 삶이란 게 대략 난감하기만 한 시절입니다.



이 가을, 신문의 행간마다 이 나라 가장들이 걸머지고 가야 할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사상 유례없는 전셋값 폭등으로 서민들은 부평초처럼 이리저리로 밀려다닙니다. 좀 더 싼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아파트를 뒤지고, 빌라를 뒤지고, 지하 단칸방을 이잡듯 뒤져야 합니다.

더 이상 밀려날 곳도 없는 이들은 자꾸만 낭떠러지로 떠밀리면서 안간힘을 쓰며 버팁니다. 거대한 자본의 쓰나미를 만나 추풍낙엽처럼 밀려다니면서도 가족들을 먼저 걱정하는 가장들의 몸부림이 처연합니다.

그뿐입니까. 늘어나는 빚더미를 감당하지 못해서 살던 집이나 상가가 경매에 부쳐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봐야 하는 가장들도 늘고 있다는군요. 겨울이 눈앞인데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야 할 가장들과 그들이 지켜내야 할 가족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법안 통과가 늦어지면서 속절없이 한숨만 쉬는 영세상인들의 눈물은 또 어떤지요. 대기업들이 세운 대형 슈퍼마켓이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해 구멍가게 아저씨와 야채가게 아줌마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먼 이국땅까지 와서 고향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을 위해 뼈가 부서지게 일하던 이주노동자는 불법체류자 단속에 쫓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졸지에 가장을 잃고 바다 저편에 남겨진 가족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요? 이 가을 도처에 무너지고, 깨지고, 스러지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폐사지(廢寺址)처럼 사는 일조차 호사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K형. 사정이 이럴진대 나라님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행사라면서 국민들에게 협조를 부탁합니다. 그 밑에서 일하는 정치인과 고위관료들도 말끝마다 서민들을 위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떠들어댑니다.

과연 전 세계의 힘있는 나라님들이 모여서 회의 한 번 하고 나면 우리네 삶이 놀랍게 달라질까요? 이 땅의 가장들은 더 이상 식구들의 밥값과 편안한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고 행복하게 일하며 놀멘놀멘 살아도 되는 걸까요? 깊어가는 가을에 감성의 볼륨을 한껏 올린 뒤에 단풍구경을 다니면서 유유자적 살 수 있을까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각 나라 정상들을 위해 다니던 길을 내주고, 보기 흉한(?) 좌판도 걷고, 시도때도 없는 검문검색을 견디고 나면 백성들의 삶이 더 한층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미국 유명대학의 교수가 썼다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밑줄치며 읽지 않아도, <슈퍼스타K 2>의 허각이 우승하라고 ARS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노력한 만큼 식구들의 삶 또한 평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정당한 대가가 돌아와서 앞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오는 봄날 모두가 웃었으면

K형. 곧 겨울입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부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걷지 않아도 되는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여, 다시 오는 봄날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 강아지 같은 것들아. /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존재한다.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박목월 ‘가정’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