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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TV

‘58년 개띠’와 드라마

나이 오십줄의 친구가 술자리를 마다하고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드라마를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출생비밀, 재벌과 신데렐라, 음모와 복수가 판치는 ‘막장드라마’라니…. 왕년에 그는 술자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오던 친구였다. 그랬던 친구가 고백했다. 요즘 드라마 보면서 하도 울어서 ‘마누라’로부터 타박을 받는다고. 틀면 나온다고 해서 ‘수도꼭지’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 자리에 있던 또다른 50대 여성이 “내 남편도 드라마 중독”이라면서 “요일별로 어떤 드라마를 하는지 줄줄이 꿰고 있다”고 했다. MBC 일일시트콤 <몽땅 내 사랑>의 중년사내 김집사(정호빈)는 극중에서 드라마 ‘광팬’이다. 그는 드라마 속의 세계가 마치 현실세계인양 일희일비한다. 

최근 시청률 조사회사 AGB닐슨미디어리서치는 중장년 남성들의 드라마 시청비중이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다는 자료를 내놨다. 시청률 상위에 오른 드라마일수록 다른 드라마들에 비해 중장년 남성시청자의 비중이 높다는 분석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왜 이 땅의 아버지들이 드라마에 심취했을까. 과거 남성시청자들은 뉴스와 스포츠 외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기껏 정통사극이나 기웃거렸던 그들이 저녁마다 TV 앞에 서성거리는 이유가 뭘까. 흔히 ‘베이비부머’이자 ‘58년 개띠’로 상징되는 그들은 우리 나이로 54세다. 공식집계로 80만명(130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이 태어난 ‘58년 개띠’들은 반평생을 경쟁 속에서 보냈다. 한 반이 70명이 넘는 ‘콩나물교실’에서 공부했고, 청년기를 유신독재 밑에서 보냈다. 광주민중항쟁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걸 무력하게 지켜봤지만, 1987년 6월항쟁 때는 ‘넥타이부대’의 선봉에도 섰다.

경제 고도성장의 핵심엔진이었던 그들은 휴가도 반납한 채 일하면서 그것이 가족과 국가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단군이래 최대 호황의 한가운데서 흥청망청 술집을 드나들고, 해외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과 2008년 닥친 국가 부도위기 속에서 그들은 맨 먼저 퇴출돼야만 했다. 누군가는 길거리에 나앉고, 또 누군가는 쓸쓸하게 낙향을 했다. 

세계 경제가 또 한번 출렁이는 요즘 그들은 불안하다. ‘100세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지만 모아놓은 노후자금도 없이 맞을 노년이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따지고 보면 ‘반값 등록금’ 논쟁의 핵심에 베이비부머가 있다. 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대학에 재학 중이다. 명예퇴직을 했거나, 직장에서 버티고 있는 그들에게 한 학기 500만원의 등록금은 적은 돈이 아니다. 게다가 청년백수와 비정규직도 그들의 자녀들이다. 뼈 빠지게 대학공부 시켜놓은 자녀들의 취직까지 걱정해야 한다. 앞날을 생각하면 밤잠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의 하소연이 결코 엄살은 아니다.

요즘 나도는 우스갯소리로 ‘매맞는 남편 시리즈’가 있다. 40대는 전날 밤 술먹고 들어가서 아내에게 해장국을 끓여달라고 했다가 맞고, 50대는 외출한 아내가 언제 들어오는지 물었다가 맞는다. 60대는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다가, 80대는 아침에 눈 떴다고 맞는다던가. 그냥 웃고 넘어가기엔 비애가 느껴지는 유머시리즈다.

오늘 이 땅의 중년들은 사면초가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개뿔’도 없으면서도 체통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당대의 중년들은 여성이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중심사회가 급격히 무너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주머니는 비고, 위엄은 떨어지고, 건강은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학창시절 취미란에 기껏 독서나 축구를 적어냈고, 한창 나이에 직장과 술집을 오갔던 그들에게 자신을 갈무리할 취미도 별반 없다. 사냥이 버거워 하이에나가 돼가는 늙은 수사자 꼴이다.

절해고도의 그들에게 드라마는 일종의 도피처다. 잘생긴 재벌2세가 이혼녀를 쫓아다니고, 출생비밀이 밝혀져 신분이 바뀌는 여주인공들이 재미 있어서가 아니다. 발가락에 연필을 꽂고 쓴 듯한 ‘막장드라마’를 보면서도 어느새 눈물을 흘린다. 아무 의미도 없는 대사 한마디, 주인공의 따발총 대사를 듣다가도 눈물이 난다. 때로 ‘나는 가수다’의 노래를 듣다가 1970~1980년대 어디쯤에서 튀어나온 추억을 부여잡고 운다. 왜냐, TV 앞에선 눈물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중년’은 듣기만 해도 가슴 미어지는 이름이 됐다. 그들은 88번 크레인 위에서 200여일을 버티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결기가 부럽고, ‘고·소·영’이나 ‘강·부·자’를 욕하면서도 그들의 부와 권력이 부럽다. 비가 와서 산행도 어렵고, 친구들 불러내서 소주 한 잔 하자니 그것도 부담스럽다. 이런 날은 드라마가 제격이다. 지킬 것도 별로 없는 그네들이 할 수 있는 건 ‘본방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