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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똑 군, 페북 양

어떤 결정

추석 차례상에 으레 ‘조율시이(棗栗枾梨)’가 오르듯 ‘추석민심’ 또한 오래된 차림상이다. 특히 총선이나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추석민심의 향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 사람만 모이면 정치얘기부터 꺼내는 게 이 나라 백성들이어서 추석에 형성된 여론이 표의 향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추석 상차림은 남달랐다. 마치 대추나 밤, 감, 배 옆에 멜론이나 바나나가 올라온 느낌이랄까.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올라와 있어야 할 자리에 안철수와 강호동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추석 연휴 기간 내내 어딜 가든 온통 두 사람 얘기뿐이었다. 
 

<경향신문 DB>

알다시피 안철수는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철회하고 박원순 변호사와 후보 단일화를 이뤘다. 이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래된 ‘밑반찬’인 박근혜의 지지율을 능가하면서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종편 출범을 앞두고 스카우트 표적이 됐던 강호동은 ‘탈세 폭탄’을 맞고, 추석 직전에 ‘잠정 은퇴’를 선언했다. 

이 두 사람의 결정은 국민에게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안철수는 50%가 넘는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5%밖에 되지 않는 후보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양보했다. 스스로 “무식한 강호동이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라고 밝힌 강호동의 잠정 은퇴 역시 충격이었다. 비록 탈세로 여론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그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여론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또 한 사람은 여론의 질타 속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차이는 있었다. 

이 두 결정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안철수의 결정을 두고 여당에서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수순을 밟고 있는 야합, 대선을 노린 포석이라면서 폄훼했다. 강호동의 잠정 은퇴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종편으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여론의 비난을 피하려는 꼼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정에 나는 어떠한 ‘야합’이나 ‘꼼수’가 없다고 믿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과거에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는 결단을 내린 과거를 갖고 있다. 안철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컴퓨터 백신을 만들어 무료로 보급했다. 이 땅에서 컴퓨터를 쓰는 모든 이들은 그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또 2005년엔 회사 주식을 사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뒤 학생들을 위해 학교로 갔다. 그가 지난 3년 가까이 의사 박경철과 함께한 ‘청춘콘서트’도 이 땅의 청년들을 위무해온 감동적인 행보였다.

강호동 역시 ‘소년장사’로 씨름판을 뒤흔들고 ‘천하장사’를 휩쓸던 무렵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뒤 씨름판을 떠났다. 당시에도 더 이상 적수가 없는 그가 은퇴한 것에 대해 뒷말이 많았다.
 
<경향신문 DB>
 
그러나 강호동은 씨름판에 남지 않고 생소한 연예계에 입문해 강적들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수차례 연예대상을 수상하는 등 인기 MC가 됐다. 이들이 언젠가 대선에 출마하거나, 종편으로 복귀하더라도 “그것 봐라. 짜고치는 고스톱 아니었냐”고 얘기하지 않겠다. 이들의 전력으로 볼 때 어떤 계산도 숨어있지 않은 ‘순수한 결정’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너무나 오랫동안 정치판의 ‘야합’과 ‘꼼수’에 지쳐 있다. 다행스럽게도 국민은 오랜 학습의 결과로 야합과 꼼수를 읽는 눈을 갖게 됐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정치인의 야합이나, 얕은 꼼수로 국민을 기만하는 정부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는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야합과 꼼수’의 이면을 파헤치는 눈과 귀도 많아졌다. 각종 사건에 휘말린 유명인들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했던 말들 때문에 더 큰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늘 확인하는 거지만 이 나라 백성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이들을 가장 싫어한다. 그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유명인이거나 공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앞으로의 정치는 조직이나 공약보다는 진정성이 승리하는 정치가 될 것이다. 국민도 정치적 배경보다는 진정성을 가진 인물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정당정치의 한계가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안철수가 정치판에 들어오면 때가 묻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한 정치인들이야말로, 자신의 때부터 벗겨내야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도덕성과 진정성을 가진 이들을 국민의 충복으로 뽑고, 그들이 진정 국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나라에 살 자격이 있다. 우리 국민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을 겪어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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