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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똑 군, 페북 양

왠지, 이 가을이 쓸쓸하다

풍경 하나. 

올봄에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가봐야겠다고 맘먹었지만 늘 쫓기듯 제주도를 다녀왔기에 작지만 아름다운 섬, 마라도를 보는 건 쉽지 않았다.

‘마라도는 내 제주도 생활에서 한라산 꼭대기의 그 구름 속에 가득한 전망과 함께 내게 태고 이래의 초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기이한 용기를 베풀어 주었다.’ (고은 <나의 삶, 나의 산하> 중에서).



마라도의 장군바위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찍이 시인 고은은 제주도에 머물던 낭인 시절부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마라도를 가끔 찾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풍성한 자연의 숨결을 빚어 훗날 노벨상 후보에 오른 저력의 터전을 마련했음은 불문가지다. 그런 고은의 증언을 떠올리면서 나 역시 부푼 기대를 갖고 모슬포항을 떠나 마라도의 선착장에 내렸다.

나그네 반기는 마라도의 입간판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그네를 반긴 건 우선 자장면집의 대형 입간판이었다. 선착장 앞 대여섯집의 자장면집들이 저마다 원조임을 내세우면서 섬의 첫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가관이었다.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녀간 곳, 모 드라마 촬영지로 제공된 곳 등 온갖 선전문구들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골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수십대의 전동 골프카트였다. 알다시피 마라도는 아이들의 걸음으로도 한 시간 안쪽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을 골프카트를 타고 돌아볼 수 있는 관광상품을 마련하여 선착장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 역시 휙 하니 카트에 올라 섬을 한 바퀴 돌고 떠나는 거였다.

‘바람만이 그 섬을 지배하는 유일한 신’이라던 고은 선생의 증언은 이미 허언이었다. 천천히 걸어 섬을 돌아보는 나그네에게 골프카트는 서울 시내를 질주하는 수많은 차량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풍경 둘. 

광화문에서 서대문 사이에 들어선 모 대기업의 신축사옥이 최근 완공됐다.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을 무렵 그곳을 지나다가 나는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 앞의 은행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묘목 수준의 은행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족히 수십년은 자랐을 은행나무를 다 뽑아버리고 다른 주변의 나무들과 키도 맞지 않는 은행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이 거리를 걸어본 사람들이라면 가을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주는 가로수의 정취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 건물 앞의 은행나무들만이 작은 나무로 바뀌어서 이가 빠진 듯 허전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개발광풍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 속에서 사실 이런 풍경들은 너무나 자주 봐서 익숙한 풍경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불편한 장면들을 떠올리면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불편한 풍경

지난해 10월 101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타계한 구조주의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탁월한 명저 <슬픈 열대>에서 개발광풍 앞에 희생되는 브라질 원주민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원시의 자연과 순수한 인간세계를 급격히 황폐화시키는 서구의 탐욕을 공격하면서, 야만의 삶이 결코 서구문명의 하위개념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는 아마존 원시부족이야말로 생태계를 보전하는 지혜를 가진 인간적인 집단이라고 규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없이 시작한 지구의 삶이 결국 인간이 없이 끝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세상을 떴다.



마라도 등대.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강을 파헤치고, 도로를 넓히고, 나무를 뽑고, 간판을 바꿔단다. 새로운 기술을 앞세운 문명의 이기들이 개발되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바로 직전의 것들은 하루아침에 용도 폐기되어 산업쓰레기로 전락한다. 
정치인들의 공약을 위해,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만행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미래세대를 위한 일이라고 장담한다. 한편에서는 그런 행위들을 미덕으로 칭송한다. 그 사이에 낀 인간들은 자꾸만 왜소화되면서 산업쓰레기로 버려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또다시 가을, 노란 국화는 올해도 여전히 노랗게 피었다. 그런데 과연 미당의 ‘국화 옆에서’의 감성이 여전히 이 땅에도 존재할까. 소쩍새 울음도 그치고, 거울 앞에선 누이도 사라진 시대. 왠지 이 가을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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