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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TV

[아이콘, 그때 그시절]①1970년대의 이소룡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변두리극장, 이본동시상영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정무문(精武門)>(1973)이라는 영화였지만 제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스 리, 이소룡을 그쯤에서 만났다. 바야흐로 이 땅에는 새마을운동으로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난무했지만, 여전히 보릿고개 넘기가 힘들었던 시기였다.

머리에 기계독이 오른 까까머리 중학생, 여드름 투성이의 고등학생들은 저마다 2편 동시상영관으로 몰려갔다. 당시만 해도 소위 개봉관에 학생들이 출입하는 건 자유롭지 못했기에 동시상영관이나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극장은 학생들의 명소였다. 더군다나 이소룡의 영화는 미성년자입장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150원만 내면 매일 체육선생에게 얻어터지고, 지긋지긋한 수학공식을 외워야 했던 현실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이소룡은 피가 끓어 주체를 못하던 청춘들에게 기름을 들이부었다. "아비요"라는 기합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날릴 때마다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어느 한 곳 흠잡을 데 없는 근육질 몸매로 절권도를 구사하면서 붕붕 날아다니던 이소룡은 단박에 까까머리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가 사용하던 쌍절곤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시골마을까지 파고 들었다. 당시 서울 동대문 체육기구 상가에서 판다는 쌍절곤을 사러 무작정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도 있었다. 책가방 깊숙이 쌍절곤을 감추고 등교한 까까머리들은 쉬는 시간 화장실 뒤에 모여 마구 휘두르다가 머리가 터지고 코피를 쏟았다. 생전 브로마이드 한 장 사지않던 청춘들은 책상 앞에 이소룡의 사진을 붙여두고 언젠가 이소룡처럼 멋진 근육질 몸매로 붕붕 날아다닐 그날을 꿈꾸었다. 남몰래 뒤뜰에 나가 쌍절곤을 휘두르고, 나무기둥을 새끼줄로 두른 뒤 주먹에 피멍이 들도록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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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숨어들어가다시피 한 영화관에서 홍콩의 영화제작사인 골든하베스트나 워너 브라더스의 로고가 떠오르기만 해도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당산대형> <용쟁호투> <맹룡과강>은 보고 또 볼 수밖에 없는 질리지 않는 영화 중의 영화였다. 이소룡의 영화는 검술과 와이어액션으로 과장됐던 홍콩영화의 판도를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았다. 과장이 아닌 맨몸으로 개척한 리얼리티가 이소룡 영화의 생명이었다. 이소룡의 그 것이 카메라로 조작된 연기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가 로마 콜로세움에서 미국의 액션배우 척 노리스(맹룡과강)를 때려누이고, 홍금보(용쟁호투)와 레슬러 카림 압둘 자바(사망유희)를 쓰러뜨릴 때마다 그에 대한 신앙심은 깊어만 갔다.

당대의 청춘들은 이소룡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 익혔다는 태극권과 영춘권, 공력권을 익히기 위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쿵푸도장으로 몰려갔다. 동네 패싸움에 쌍절곤이 등장하여 피가 튀는 혈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가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 색깔에 검은 줄무늬가 쳐진 트레이닝복은 선망의 대상이 됐지만 그걸 사입을 만한 형편이 되는 청춘들도 많지 않았다.

당대의 문화아이콘 이소룡이 맹활약 하던 시기는 한국 정치사의 암흑기였다. 1972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해 10월유신을 선포했다. 박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소위 통일주최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로 만들면서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까지 가졌다. 불황의 시대였지만 당대의 성인들은 영화 <대부>나 <007 시리즈>를 보면서 독재의 아픔을 삭였고, 청소년이나 젊은층들은 이소룡의 영화에 빠져서 고단한 세월들을 잊었다. 당시 각 가정에는 금성사(현 LG)에서 생산한 흑백TV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70㎜ 와이드 화면에서 총천연색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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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월 영화 <사망유희>를 찍던 이소룡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때 이 땅의 까까머리들은 절망했다. 자신들의 유일한 영웅의 죽음 앞에서 닭똥만 한 눈물을 흘리며 주먹으로 훔쳐내야만 했다. 이후에도 이소룡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들이 끊이지 않았다. 염문을 뿌리던 여배우와 함께 있다가 죽었다고도 했고, 그의 무술을 시기한 폭력조직이 암살했다고도 했다. 이 땅의 청춘들에게 그의 죽음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제임스 딘의 그것과 달랐다. 노랑머리 서양인들 사이에서 아시아인의 자존심을 세웠던 한 배우의 죽음이었고, 영화배우를 넘어 진정한 무도인의 길을 걷던 '스승'의 죽음이었다. 이후 한국과 홍콩 시장에 당룡, 거룡, 여소룡, 한소룡 등 많은 배우들이 출현하면서 이소룡의 후광을 기대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홍콩의 액션영화도 이연걸과 성룡, 주성치 등이 뒤를 이으면서 명맥을 이어왔지만 이소룡의 죽음과 함께 세가 기울어갔다.

당대를 살았던 이 땅의 중년들은 지금도 이소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회고한다.

"미성년자 입장불가였던 이소룡의 영화를 보기 위해 아빠의 모자와 바바리코트는 필수였다"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감독 유하는 그의 책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투른 쌍절곤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줬다.'

굵고 짧은 인생을 살다간 부르스 리. 미국 워싱턴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무도인이자 영화배우로 살다간 이소룡에게 70년대 청춘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그의 진정성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런 진정성에 열광했던 세대였던 베이비 부머들은 산업사회 역군으로서 그 몫을 다하고 서서히 은퇴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소룡이 남긴 말 역시 이 시대에 유효하다. 부르스 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까.

"당신이 어떤 삶을 산다해도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인생의 어떤 달콤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이소룡의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