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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TV

[아이콘, 그때 그 시절]③흑백TV 시대의 영웅들

금성TV를 기억하는가. 1966년 이 땅에 첫선을 보인 요술상자의 이름이다. 지금의 LG가 만든 흑백TV는 고단한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70년 TV 보급대수가 30여 만대 뿐이었으니 한 동네에 한두대의 TV가 고작이었다. 집에 TV가 있다는 건 부의 상징이었고, 그것은 곧 권력이었다. 어린시절 어른이건 아이건 TV를 보기 위해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다. TV가 있는 집의 아이는 평소 친한 친구만 ‘입장’시켰다. 여름날 저녁 시골마을의 안마당에 TV를 내놓고 온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TV를 보는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시골마을 중요한 프로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동네 만화가게에서 돈을 내고 봐야만 했다.


타잔과 형사 콜롬보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필시 머리에 서리가 내렸거나 뒷머리가 훤할 것이다. 텔레비전을 송출하던 방송사가 단 세 곳(KBS, MBC, TBC) 뿐이었고, 그나마 TBC는 난시청 지역이 많아서 못보는 곳이 많았다. 1970년대 TV 프로그램 제작환경은 스튜디오 세트에서 이뤄지는 드라마가 고작이었다. 이때문에 흑백TV시대 콘텐츠는 외화시리즈가 주를 이뤘다.

■밀림의 왕자 타잔과 어눌한 형사 콜롬보

MBC가 1974년 방영을 시작한 <타잔>은 흑백TV 세대들에겐 잊을 수 없는 시리즈다. 팬티 한 장만 걸친 타잔이 줄 하나로 밀림을 누비면서 “아아아아”하고 외치면 코끼리떼들이 모여들어 함께 악당을 물리치면 숨죽이며 TV를 보던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늘 타잔 곁을 따르는 침팬지 치타와 아름다운 여자친구 제인도 잊을 수 없다.

<타잔>은 1914년 E.R.버로스의 소설 <유인원 타잔>을 원작으로 한 외화시리즈였다.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버려진 아기를 침팬지가 길러서 민첩함과 영민함으로 밀림을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1980년대까지 총 18명이 타잔 역을 맡으면서 명성을 이어온 것만 봐도 타잔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국내 방영됐던 <타잔>은 미국 MGM사가 제작한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조니 와이즈뮬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였다.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아이들 사이에서 치타 흉내를 내는 것이 대유행이었으니 당시 <타잔>의 인기가 짐작이 간다.

70년대 흑백TV 시대 또 한 명의 영웅은 형사 콜롬보였다. 1968년 미국 NBC TV에서 제작한 시리즈 <형사 콜롬보>(KBS 방영)의 주인공 콜롬보 반장 역의 피터 포크는 구겨진 트렌치 코트에 부스스 한 머리, 왜소한 체격의 수사관이었지만 탁월한 추리력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했다. “아, 그런데 제가 잊은 게 있어서 말이죠”라면서 범인을 옥죄 오는 말투는 고인이 된 성우 최응찬씨의 코믹하면서도 어눌한 더빙 때문에 더 유명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된 범죄수사물 시리즈인 MBC <수사반장>의 반장역 최불암의 캐릭터 역시 콜롬보에서 착안한 캐릭터였다.

■최초의 국민드라마 <여로>의 태현실과 장욱제

“너희는 저 놈의 <여로> 때문에 열 안받냐?”

최근 방영중인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빛나라 쇼단 단장 신정구(성지루)는 다방 구석에 앉아 드라마 <여로>를 보는 단원들을 향해 소리를 친다. 제대로 된 공연조차 못올리고 있는 마당에 드라마에 빠져있는 단원들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72년 KBS를 통해 전파를 탄 <여로>는 명실상부한 국민드라마였다. 당시 시청률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여로>가 방영될 때면 쇼단이 국장문을 닫고 개점휴업을 해야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매일 오후 7시30분 일일드라마로 방영된 <여로>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분이(태현실)가 최주사집의 모자라는 아들 영구(장욱제)와 결혼한 뒤 겪는 신산한 삶을 그린 드라마다. 이남섭 PD가 극본 및 연출을 맡았던 드라마로 지난해 고인이 된 박주아와 넌버벌 파포먼스 <난타>를 만든 송승환이 아역으로 출연했다.

마치 현대판 평강공주를 연상케 하는 분이 역의 태현실은 절망과 아픔을 담고 일어서는 한국적인 며느리상을 그리면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여로>가 큰 인기를 끌게된 배경에는 영구 역의 장욱제가 있었다. 기계충 자국으로 허옇게 빈 머리, 절둑거리는 걸음걸이, 앞니가 빠져 발음이 부정확한 말투의 새신랑 영구는 단숨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끝마다 “우리 색시”를 챙기면서 바보 영구는 모자라지만 순수한 캐릭터의 대명사가 됐다.

70년대 신산했던 삶을 살아야 했던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여로>를 보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혀를 차고 눈물을 훔쳤다. 하루하루 울고 싶도록 힘든 삶에 지쳐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드라마를 핑계로 실컷 울 수 있었다. 훗날 심형래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재현했던 ‘바보 영구’ 캐릭터는 장욱제가 원조였던 셈이다. 그러나 장욱제는 이 역할이 너무 강렬했던 각인된 탓에 배우 생활을 접고 파라다이스 그룹 계열사 전무가 되어 제주도에 내려갔다. 여하튼 <여로>는 한국 최초의 국민드라마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