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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TV

‘명품녀’와 ‘명품방송’ 사이

소위 ‘4억원 명품녀’로 마음이 상한 국민들이 많다. ‘4억원 명품녀’로 지칭된 김경아씨는 지난 7일 Mnet <텐트 인 더 시티>에 출연, “자신이 현재 입고 있는 옷과 장신구 등이 4억원어치에 이르며 직업이 없지만 부모님의 용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유지한다”면서 “내가 패리스 힐튼보다 못할 게 없다”고 큰소리쳤다.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네티즌들의 비난여론이 들끓자 급기야는 국회까지 나섰다. 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 출석한 국세청장에게 “서민에게 상실감과 박탈감을 주는 ‘명품녀’에 대해 과세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방송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M.net <텐트 인 더 시티> / 경향신문 자료 사진 (M.net 제공)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이 사건을 접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됐을까. ‘총체적 난국’이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자문해봤다.

이 프로그램을 방송한 Mnet은 대한민국 케이블TV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CJ그룹 산하에 있는 방송사다. 나름대로 자긍심과 책임감을 갖고 있을 방송사가 이처럼 자극적이고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을 방송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옐로 저널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이 사건을 보면서 케이블TV 시장을 잠식해온 방송사 경영진의 도덕 불감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조작까지 했다면 이는 더욱 심각하다. 조작가능성이 제기된 이후 Mnet 측은 방송 내용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 없이 조작이 아님을 증명할 자료를 갖고 있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직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있는 듯한 태도다.

쇼·드라마 심의 잣대는 느슨

시청률 경쟁이 몰고 온 방송의 선정성과 폭력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KBS <개그콘서트>의 거의 유일한 사회풍자 코너인 ‘동혁이 형’에서도 최근 “대한민국이 불륜 공화국이냐”며 공중파 드라마를 질타했다. 그는 “방송 중인 공중파 드라마에 불륜장면이 1시간에 한 번씩 나온다”면서 “불륜이 무슨 57분 교통정보냐”고 비꼬았다.

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까지 방송의 선정성을 걱정하게 된 배경에는 방송의 산업적 기능만을 강조해온 현 정부의 실정 탓도 있다. 과거 방송위원회 시절에는 심의기능이 일정 역할을 해왔지만, 방송통신위원회의 출범 이후 심의기능이 점차 약화돼 왔다. 도대체 이 나라에 건전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문제가 된 시사 프로그램에 대한 제재는 신속하고 강력하게 이뤄지면서도 쇼·오락 및 드라마 등에 대한 잣대는 놀라울 정도로 느슨하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온통 권력 유지의 방편인 종합편성채널 허가에 몰두하고 방송 경영진이 각종 시사 프로그램과 눈엣가시 같은 비판적 방송인 퇴출에 앞장서는 동안 방송 프로그램은 악취를 풍기면서 썩어온 것이다. 이로 인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불륜을 저지르고 젊은 여성이 연하 남성을 동물처럼 사육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돼도 무감각해진 것이다. 그뿐이랴. 소위 식스팩과 S라인을 앞세운 속옷에 가까운 차림의 연예인들이 브라운관을 누벼도, 포장마차에서나 나눌 수 있는 한심한 연예인들의 잡담이 방송돼도 문제 삼지 않게 된 것이다.

국내 방송 시장은 종합편성채널 및 보도채널, 홈쇼핑채널 등의 허가를 앞두고 또 한 번의 빅뱅이 예상된다. 그러나 빅뱅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게 사실이다. 신문시장의 질서를 왜곡시켜온 거대 언론사들이 수천억원을 끌어들여 종편을 시작하면, 광고 확보를 위한 치열한 시청률 경쟁으로 한층 더 자극적인 방송 소재가 난무할 것이다. 방송통신위윈회는 자신들이 허가한 방송사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유·무형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느슨한 심의 잣대로 프로그램 감시에 소홀할 것이다.

시사 프로그램엔 신속한 제재

고추장 듬뿍 넣고, 조미료로 뒤범벅된 자극적인 방송이 우리의 정서를 해치고 있는 오늘, 우리 방송은 좀 더 심심해질 필요가 있다. 다큐멘터리와 시사 프로그램, 책 읽어주고 그림을 설명하는 프로그램이 프라임 시간대에 방송돼야 한다. 경쟁력 강화를 앞세워 시사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선정적인 프로그램을 장려하는 사장은 퇴출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방송사의 PD가 자녀들에게 “아빠(엄마)가 만든 프로그램이니 꼭 챙겨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수억원어치 명품을 두르고 방송에 나와 큰소리치는 ‘불쌍한 영혼’들이 양산되는 걸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