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밥도 빵도 안되는 시

운주사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운주사(雲住寺)



/시바타 산키치/


붉게 익은 고추가 바람에 흔들리는


눈이 닿는 한 끝없이 펼쳐진 고추밭은


석양에 불타는 구름 같다


운주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바람에 이끌려


드문드문 비치는 사람 그림자와 함께 간다




천의 탑, 천의 돌부처가


이 들판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햇빛 아래, 부처의 등이 깨어지고


얼굴은 잘려서 떨어져 나가


풀숲에 잠들어 있다


9층이었던 석탑도 7층으로


하늘이 무너뜨린 것인가


사람이 무너뜨린 것인가




기단에 걸터앉아


광주에서 온 노인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이것도 부처님, 저것도 부처님입니다”


사방에 흩어진 돌조각들을 가리키며


오래된 일본어를 기억해내면서


가르쳐 준다




이것도 부처님?


밟고 왔던 풀 속에서


돌조각을 하나 줍는다


이제 상처는 치유되었을까


안으로부터 마멸된 돌은 뜻밖에 가볍다


일찍이 부처였고


지금도 부처인 돌




-시집 ‘나를 조율한다’(문학수첩) 시 일부


일본시인의 시집 속에서 우리 땅을 읊은 시를 보니 반갑다. 하긴 천불천탑이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눕거나 앉아있는 풍경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시인이 어디 있으랴.


2001년 여름, 한국을 여행했던 시바타는 광주 거리에 내걸린 천수막을 보았다. 그가 짧은 한글실력으로 간신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사교과서’였다. 그 앞에서 시인은 ‘아주 부끄러웠다’고 술회했다. 그래서인지 운주사에 갔던 그는 ‘이제 상처는 치유되었을까’라고 묻는다.


독도문제, 일본군 위안부, 친일언론 등으로 이땅의 삼월이 시끄럽다. 일본의 지식인 한일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반성하는 지금, 이땅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아직 과거사 청산에 너무나 인색하다.

'밥도 빵도 안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도 꽃처럼  (0) 2015.07.29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때  (0) 2015.07.28
그냥  (0) 2015.07.23
이렇게 좋은 날  (0) 2015.07.22
명태 덕장에서  (0) 201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