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뭐니뭐니 해도 뒷담화

편히 쉬세요, 앙선생

앙드레 김, 아니 김봉남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그 분이 세상을 떴다. 원로배우 최은희부터 최지우, 탤런트 최불암부터 원빈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초월한 스타들의 조문행렬은 그의 그림자가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왕년의 톱스타였던 엄앵란을 시작으로 손녀뻘인 고아라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스타들이 그가 바느질한 옷을 입은 셈이니 그 영향력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앙선생’은 그의 표현처럼 ‘판타스틱’하고 ‘엘레강스’한 생애를 살다 가셨다. 많은 이들이 그 분을 추모하는 건 자신의 꿈을 위해 일평생을 매진해온 열정에 대한 헌사이리라. 패션에 문외한이지만 그 분의 독특한 디자인은 온 국민이 알 정도로 개성이 강하고 특별했다. 끊임없는 열정으로 평생을 지켜온 원칙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 앙드레 김의 디자인이 담긴 냉장고와 아파트, 아동복과 아틀리에까지 생긴 셈이다. 이왕이면 일반 서민들도 한번쯤 입을 수 있는 대중적인 브랜드도 개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



꿈 위해 일평생 매진 ‘열정의 삶’

내가 앙선생을 자주 만난 건 아이러니하게도 패션쇼장이 아닌 공연장과 전시장이었다. 외국 팝스타의 내한 공연장은 물론 유명한 오케스트라 연주회, 유명 화가의 전시장에서 어김없이 독특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에 흰 의상을 입은 그 분과 마주쳤다. 그런 앙선생을 공연장에서 자주 보면서 한때 오해를 한 적이 있다. ‘연예계 마당발’답게 VIP 초대권을 받아서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앙선생은 모든 공연 티켓을 직접 구입하고, 외국에 소개할 만한 공연은 각국 대사를 부부동반으로 초청하여 보여주었다고 한다.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몇몇 공연기획자는 볼 만한 공연이 있을 때마다 앙선생에게 연락해 매번 수십장씩 VIP석을 판매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에도 나는 한 힙합가수의 공연장에서 앙선생을 만났다. 내가 알기로는 그날 공연장에 온 관객 중에서 ‘70대 할아버지’는 앙선생이 유일했다.

그는 한마디로 왕성한 문화포식자이자 날카로운 문화평론가였다. 공연이 끝난 뒤 공연을 본 소감을 여쭤보면 그 분은 늘 “뷰티풀, 판타스틱, 엘레강스”를 앞세웠다. 그러면서도 공연이나 전시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얘기했다. 간간이 언론 인터뷰에서 내비친 문화에 대한 식견은 허접한 평론가 이상이었다. 마이클 잭슨과 에릭 클랩튼에서부터 빈필하모니의 공연이나 피카소전 등을 보고 나서 피력한 그의 소감에선 오랫동안 공연장이나 전시장을 누벼온 문화마니아의 내공이 빛났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비평도 거침이 없었다.

앙선생 하면, 많은 이들이 뚜렷이 기억하는 한 장면이 있다. 1999년 옷로비 사건 때 국회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 전국에 중계방송된 그 현장 말이다. “앙드레 김 말고, 본명이 뭡니까?”라고 국회의원이 다그치듯 묻자 앙선생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봉남입니다”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지긋한 나이에 치욕스러운 한 장면이었지만 이후 앙선생이 그 사건으로 분노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일로 검찰 조사와 세무조사가 이어졌지만 그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정도였다. 그뒤로도 온갖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당신을 소재로 다뤘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당신이 직접 나서 웃음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식견 갖춘 ‘진정한 문화마니아’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무뎌진다. 노여움도 많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앙선생은 병실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꿈을 위해 일했고, 돈 몇 푼 더 벌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또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입에 올리면서 낄낄거려도 결코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9개의 신문을 보고, 5개의 TV채널을 모니터하고, 두 시간에 걸쳐 머리염색을 하는 집요함이 자리잡고 있다. 공연장과 전시장에 가서 시대의 트렌드를 읽고, 이를 디자인에 반영하려는 노력도 숨어 있다.

나는 지치지 않는 문화마니아 앙드레 김이 좋았다. 아니, 김봉남이라고 불러도 사람좋게 웃던 그 분이 참 좋았다. 수많은 추모글 중에 천국에 계실 앙선생을 빙그레 웃게 할 글이 눈에 띈다. “이제 천사들의 패션이 좀 더 화려해지겠군요.”

앙선생. 천국에선 부디 일만 하지 마시고 ‘놀멘놀멘’ 하시길. 예쁜 천사랑 연애도 하고, 장가도 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