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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똑 군, 페북 양

문득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립다

 

 

 

 

                        <뿌리 깊은 나무> 창간호 표지

 

 

 

문득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립다

 

 

 

 <뿌리깊은 나무>(한국브리태니커사 발행)라는 월간지가 있었다. 1976년 창간되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 됐으니 불과 4년여의 짧은 생명을 가진 잡지였다. 그러나 폐간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잡지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뚜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참 인상깊은 잡지였다. 

 <뿌리깊은 나무>는 창간호부터 잡지의 정형을 깼다. 우선 한자 제호가 난무하는 잡지시장의 추세와 달리 순한글의 긴 제목에 본문도 한자가 전혀 없는 한글전용에 가로쓰기였다. 게다가 잡지 최초로 아트디렉터를 고용하여 디자인 개념을 도입했다. 요즘 잡지들은 디자인 과잉으로 불편하기까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실로 엄청난 파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진 한 장, 기사 한 줄 버릴 게 없는 잡지였다.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끈질기게 파헤친 르포에서부터 시골 촌부가 들려주는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이 담긴 칼럼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전남 광주에서 무허가 주택 철거에 항의하면서 온 몸으로 저항한 ‘무등산 타잔’의 이야기, 평생 외길을 걸어온 장인들의 뚝심을 조명한 인터뷰, 가난한 어촌에서 평생 배를 타면서 자식을 키워온 촌부들의 이야기까지. 지금도 인상깊은 기사들까지 그 잡지에 가득 실려 있었다. 그당시 그 잡지의 기자가 되기 위해 지원했다가 낙방한 쓰라린 기억을 빼면 나에게 <뿌리깊은 나무>는 참 특별한 잡지였다. 

 

 

 오래전 폐간되어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잡지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 잡지를 발행한 한창기 선생의 우리 문화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우선 한창기 선생(1936~1997)의 이력부터 살펴보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한창기 선생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출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법조인의 포기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이 되었다. 미국인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한국사람으로 통했던 그는 탁월한 판매실적으로 외국계 회사인 ‘브리태니카 코리아’ 사장이 되었다. 훗날 웅진그룹의 회장이 된 윤석금 회장도 한창기 선생의 밑에서 세일즈맨의 기본을 배웠다.

 한 선생은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 토종문화에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를 복원하기 위해 한 평생을 바쳐온 분이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에 그가 직접 쓴 발행사에는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잘사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겠습니다. ‘어제’까지의 우리가 안정은 있었으되 가난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물질가치로는 더 가멸돼 안정이 모자랍니다. 곧, 우리가 누리거나 겪어온 변화는 우리에게 없던 것을 가져다 주고 우리에게 있던 것을 빼앗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 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한창기 선생은 눈 깜짝할 새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문화 즉, 토박이 문화를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이를 실천했다. 다만 과거에만 매몰되지 않고, 새로움도 추구하면서 우리 문화를 발전 계승시키기를 열망했다. 그가 어느 기업에 써준 ‘10년을 입어도 새것 같은 옷, 금새 입어도 10년을 입은 것 같은 옷’이라는 카피가 그의 생각을 대변해준다.

 그는 민족 고유의 것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잡지를 만들고, 민예품을 모았으며, 모자란 것은 복원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방짜유기나 옹기, 한복과 천연염색 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보급했으며, 백자와 서책 등 고미술품을 모았다. 당시 <뿌리 깊은 나무>에는 한 호도 빠지지 않고 우리 옛것에 대한 사랑이 담긴 기사들이 실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기사와 함께 곁들여진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의 단아한 사진들이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한창기 선생이 이같은 열정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근처에 건립된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2011년 개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 그가 살아생전 모은 유기, 도기, 민속품, 회화, 목기, 서책 등 6,461점의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돼 있다.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은 연면적 1,736.46㎡에 유물전시실과 야외전시 공간, 백경 김무규 선생 고택으로 구성됐다. 특히 수오당으로 이름지어진 김무규 선생의 고택은 전남 구례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송화가 눈먼 뒤 아버지 유봉과 함께 머무르던 장면을 촬영했던 고택으로 유명하다. 전시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의 기와, 옹기, 토기를 비롯하여 청자, 백자, 불교 의식 용구, 민속용품까지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고 한다. 선생은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전통박식 그대로 수의를 복원하는 등 우리 문화 사랑에 혼신을 다했다.

 한창기 선생의 이야기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도 절실한 메시지가 그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다. 요즘‘한류’가 전 세계를 뒤흔들면서 마치 ‘한류’가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막상 ‘한류’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허망하기까지 하다. 따지고 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문화를 비롯한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흉내내기 시작했던 우리가 확대재생산 해내기 시작한 문화가 ‘한류’실체인 것이다.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인들이 우리가 만든 아이돌 그룹과 영화, 드라마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 안에 한국적인 것은 별로 없다. 최근 문화관광부가 주도하여 한류기획단을 발족했다. 그 면면을 보면 우리 시대에 명망가들이 총망라돼 있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의제들을 보면 아이돌 그룹을 좀더 효과적으로 세일즈하여 관광산업에 기여하자는 식이다.

 하여 지금의 한류는 그 뿌리가 토종이 아닌 외래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토종문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으니, 그들이 생산해내는 ‘한류’ 역시 뿌리가 없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외래문화를 배격하고, 토종문화를 지켜나가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실체적으로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이는 그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서 만점을 맞게 하는 일보다 앞서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별도의 시험과목을 두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음 세대가 우리문화의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깃든 진정한 ‘한류’를 일궈내는데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 하긴 나 조차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외국 팝스타의 공연장, 유명 뮤지컬 공연, 클래식 공연장에는 데려갔지만 박물간에 가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가르친 적이 없으니 이런 주장 또한 민망하다.

  TV를 켜면 섹시경쟁을 펼치는 걸그룹들의 춤이 현란한 오늘, 한창기 선생이 그리운 건 노땅이 겪는 문화적 퇴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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