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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아직도 강남엔 제비가 있을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제비를 기다리며


문정희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 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계간 `시평' 여름호


오, 저 언어의 현란한 몸놀림. `물찬 제비'처럼 휘돌아 흐르면서 슬로우 슬로우 퀵퀵. `박씨보다는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라고 뒤집고,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라며 또 뒤집는다. 도저히 읽다가 킥킥거리지 않을 수 없다.

이쯤되면 사모님 혼을 빼놓는다는 `강남 제비'들의 현란한 춤솜씨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유려한 글솜씨가 아닐까.

그런데 아직도 강남에는 제비가 있을까. 8:2 가르마 타고, 반지르르하게 검은 양복을 빼입은 하얀 백구두 신사가 아직도 캬바레를 누빌까. 사모님의 허리를 부여안고 두세바퀴쯤은 간단히 휘익! 돌려주면서 "사모님 가정을 잊으시죠"한다는…. 하긴 제비도 백구두를 신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매일 아침 검은 구두끈을 조이면서 회사 가는 버스를 타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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