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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초승달 아래

 

초승달 아래


전동균


                                       경향신문 사진부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

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그락거

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시인사)


드라마로 유명해진 강릉 정동진 근처에 `등명(燈明)'이 있단다. 해수욕장도 있고 바다도 있다 했다. 어쩌면 그냥 시 속의 잔상으로 남겨놔야 더 아름다울 것 같은 어촌마을. 지치고 피곤할때 등명의 밤바다를 떠올리며 감성(感性)의 심지나 돋우면 좋을…. 그래도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건 `헐렁한 스웨터 입은 여자' 때문이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거리며 지나가는….

길 위에서 만난 그녀와 첫눈에 반해 살림을 차릴 수 있다면…. 초승달이 걸리는 저녁 바닷가 어디쯤 단칸방이면 어떠랴. 순한 바다처럼 부드러운 그녀와 흠뻑 젖고 싶다. 그 어느날, 삶에 지친 그녀가 플라스틱 그릇 날리며 악다구니를 쓴다해도. 오광수기자 ok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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