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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TV

소녀는 자라서 아줌마가 된다

 

 

 

 

 소녀는 자라서 아줌마가 된다

 

 

 


 


 

<미세스 캅>에서 엄마이자 강력계 형사역의 김희애(왼쪽)과 대학 졸업 직후 김희애(위)

 


 

 

 취재를 겸해서 김희갑·양인자 부부를 만났다. 김희갑 선생님이 36년생, 양인자 선생님이 45년생이시니 나란히 팔순과 칠순을 넘기셨다. 이들 부부가 대한민국 가요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왔는지는 삼박사일 동안 얘기해도 모자라기에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히트곡을 얘기하다가 두 분이 작사·작곡한 혜은이의 ‘열정’에 이르렀다.
 ‘안개 속에서 나는 울었어. /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 들판에 서서 나는 울었어. /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 만나서 차 마시는 그런 사랑 아니야. / 전화로 얘기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 / 웃으며 안녕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 / 가슴 터질듯 열망하는 사랑 / 사랑 때문에 목숨거는 사랑. /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 보고 싶을때 못보면 눈멀고 마는 / 활화산 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 그런 사랑. / 어둠 속에서 나는 울었어. /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 /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가슴 터질듯 열망하는 사랑, 사랑 때문에 목숨 거는 사랑’이라. 더군다나 ‘섹시의 아이콘’인 혜은이가 이 슬픈 얘기를 빠른 템포의 댄스리듬으로 부르면서 무언가를 애타게 갈망하는 표정으로 노래를 마무리 하곤 했다. 
 “선생님. 저는 TV쇼에 혜은이가 나와서 ‘열정’을 부르면 괜스레 가슴이 콩닥콩닥했어요. 가끔은 그때 그시절 혜은이가 그리워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김선생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아 그땐 우리가 모두 젊었지. 피가 뜨거웠잖아” 하신다. 옆에서 양인자 선생이 한 말씀 하신다.
 “언젠가 영화를 봤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두 사람이 나미 노래를 흥얼거리다 한 마디 하대요. ‘그런데 나미는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라구요.”
 그런 장면이라면 또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군 병사 송강호의 대사. “아 근데 광석이는 와 그러케 빨리 죽은 거임매?”.   
 소녀들은 자라서 아줌마가 된다. 그룹 소녀시대가 이미 처녀시대가 됐다. 그러나 총각 시절 나를 콩닥거리게 했던 여가수들이나 배우들이 아줌마 혹은 노처녀가 돼서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알지못할 상실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도 나이가 들고 그쪽도 나이가 들었으니 편안하게 보면 그만일텐데 한때 대한민국 청년들의 피를 뜨겁게 했던 스타들이 아줌마가 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서글프다.
 70년대 지금은 편안한 아줌마가 된 양희은이 데뷔곡들을 들으면서 나는 ‘세상에 저렇게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래서 냉큼 앨범을 구입했는데 긴머리에 화장끼 하나없이 청바지를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대학생(아마 1학년?)이 통기타를 옆에 놓고 앉아있었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에 ‘홀릭’되곤 했다. 모든게 양희은 때문이었다. 그리고 직장에서 ‘한계령’을 너무나 잘 부르던 여자 선배가 있었는데 틈날 때마다 여자 선배를 술자리에 초청하여 그 노래를 청하곤 했다.   
 요즘 TV 예능프로그램 중에서 SBS <불타는 청춘>이 있다. 뭐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를 뒤섞어서 중년 싱글남녀들이 여행을 통해 ‘썸’을 타는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강수지와 김완선이다. 아 그녀들이 아직 결혼을 안하고 싱글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 국가적인 낭비다. 강수지가 누구였나? 대한민국 모든 군인들이 오빠가 돼주고 싶은 여가수, 불면 날아갈 듯한 가녀린 외모에 미성의 노래로 남자들을 달뜨게 했다. 김완선은 90년대 한창 바쁠 때는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최초로 헬기를 띄웠던 여가수였다. 그녀가 고등학생 신분으로 갓 데뷔했을때 소속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눈은 게슴츠레한 사시눈에 머리는 완전히 산발을 해서 정리정돈이 된 느낌이 전혀 없었지만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지금의 아이돌그룹들처럼 춤과 노래를 배우기 위해 하드트레이닝을 거친 맞춤형 여가수였다. 그녀가 던진 파문은 아이유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방송 3사가 그녀를 경쟁적으로 출연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밤무대와 행사 무대에서 그녀의 주가는 최고였다. 또 스캔들도 늘 메가톤급이어서 그때마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곤 했다. 무대에서 한순간에 관객-특히 남성관객-들을 제압하는 기술은 아마 김완선을 따라잡는 가수가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불만은 그녀들이 왜 예능 프로그램에 끌려나와서 되지도 않는 사내(?)들과 썸을 타야 하는가. 뭐 그런 말도 안되는 불만이다.   
 각설하고, 드라마 <미세스 캅>의 여주인공 김희애의 열아홉 시절이 생각난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1학년이었던 김희애와 첫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다. 그시절엔 지금처럼 연기자들에게 매니저가 있지도 않았다. 몇몇 여자연기자들의 어머니들이 매니저를 대신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장미희 엄마, 도지원 엄마, 혜수엄마 등 엄마들이 딸의 스케줄을 챙겼다. 그런데 김희애는 엄마가 나서지 않았는지 직접 전화를 받았고, 어찌어찌 약속을 하여 여의도 KBS 별관 뒤에서 보기로 했다. 약속시간 무렵 10여미터 전방에서 걸어오는 김희애를 보면서 나는 기자 신분을 잊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손에 똑딱이 카메라 한 대 들고 엉거주춤 서있는 기자에게 김희애가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했지만 기자는 한동안 말을 더듬으며 얘기를 못했다. 그 강렬한 첫인상 때문인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고, 연기까지 절정에 오른 김희애를 보면서도 늘 그때 그 모습이 겹쳐진다.  
 하긴 한 시절에 미모를 뽐냈던 장미희, 최명길, 정애리, 박준금 등이 모두 엄마로 등장하는 걸 보면서 ‘소녀는 자라서 아줌마가 된다’는 진리는 변할 수 없음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그 시절 내 가슴을 뛰게 하던 스타들이 나이가 드는 건 왠지 서럽다. 마릴린 몬로의 요절로 늙은 마릴린 몬로를 보지 않게 된 건 다행인가? 불행 중 다행인가?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서로 나이들어가는 걸 보면서 한 시절을 같이한다는게 중요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