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망할 놈의 TV

<복면가왕>과 씁쓸한 가요계의 현실

 

 

<복면가왕>과 씁쓸한 가요계의 현실

 

 

        


 얼굴을 가린다는 건 익명성을 보장받는다는 차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계급장을 뗀 채 미지의 상대방과 조우한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얼굴이 잘 생겼거나 못생겨도, 늙었거나 젊었어도 가면을 쓰는 순간에 모두가 평등해진다. 또 가면을 쓰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과 만나는 것 역시 익명이 주는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한 번쯤 일탈의 충동을 느낀다.    

 어린 시절 타이거 마스크나 황금박쥐를 시작으로 최근 스파이더맨에 이르기까지 가면이 주는 반전은 보는 이들에게 재미를 주기에 충분하다. 중세시대 상류층에서 유행한 가면무도회는 무료한 세상을 좀더 즐겁게 살기위해 만들어낸 놀이라면, 우리나라의 탈춤은 서민들이 양반들을 풍자하기 위해 탈을 동원한 민중들의 놀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다르다.
 MBC의 <복면가왕>은 오랫동안 대중문화의 단골 레퍼토리인 가면 혹은 복면을 노래와 접목하여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주말 저녁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찜찜하다. 물론 <복면가왕>이 가요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편하게 즐기면 된다. 그러나 일그러진 가요계 현실을 이 프로그램이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복면가왕>의 선정 기준은 가창력이다. 물론 가수는 일반인들에 비해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서 복면을 쓰고 나온 가수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개성을 숨기고 노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TV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았던 중견가수들에서부터 가창력이 없이 춤과 노래로 승부한다는 아이돌가수에 이르기까지 재발견, 혹은 재평가를 받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어떤 가수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노래보다는 가사와 멜로디를 잘 쓰고, 개성 넘치는 보컬음색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라면 이 프로그램에 나와 매서운 질책을 받을 것이다. 모름지기 가수의 정점은 싱어송라이터인데도 말이다. 조용필이나 최백호, 송창식 같은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전혀 다른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걸 상상해보자. <복면가왕>의 제작진들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가수나 팬들의 입장에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일 것이다.   

 계급장을 뗀 가수들이 뮤지컬 배우에 밀려서 떨어지고, 아이돌 가수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가왕에 오르는 반전이 예능으로는 즐겁지만 노래의 범주로 가면 아주 쓸쓸한 일이다. 가수는 모름지기 복면을 쓰고 불러도 누구인지를 금세 알 수 있는 개성이 생명인데 <복면가왕>은 가수들에게 철저하게 개성을 숨기라고 강요한다. 좀체로 TV 출연기회를 얻기 힘든 가수들은 복면을 쓰고 개성을 숨기면서 너도나도 <복면가왕> 앞으로 줄은 선다. 그래서 <복면가왕>은 케이블TV에서 인기를 끌었던 <히든싱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예능 프로그램일 뿐이다.
 언제부턴가 가요계에 정규 앨범이 사라지고 음원시장이 되면서 대중음악의 소비패턴이 몰라지게 빨라졌다. 대중음악계 제작자들에 따르면 길어야 3주라고 말한다. 열성적인 팬덤을 몰고다니는 극소수의 아이돌 그룹을 제외한다면 정규앨범을 내는 게 엄청난 부담이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나 음악을 소비하는 팬들도 오래 곱씹지 않고 그때그때 추잉검처럼 씹다가 단물이 빠지면 이내 또다른 검을 씹는다. 이때문에 <히든싱어>나 <복면가왕>과 같은 가요예능 프로그램이 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히트넘버로 기록된 노래들을 다시 꺼내들어 추억처럼 씹고, 한동안 TV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가수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제대로 된 가요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방송 현실에서 그나마 가요예능 프로그램이 숨통을 터주고 가요계를 연명하게 만든다는 건 아무래도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때문인지 요즘 여의도에 가면 한때 잘 나가던 가요기획자들이 대부분 휴업 상태다. 그들은 온라인 음원시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거대 자본을 확보하지도 못한 채 아직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가요계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전 시끌벅쩍했던 <무한도전>의 영동고속도로 가요제도 앞서 <복면가왕>이 보여줬던 맥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무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도 멤버들과 힘있는 가요기획사의 가수들, 여기에 양념처럼 끼어드는 인디밴드들이 한 시절 먹고살 수 있는 끼니거리를 만드는 이벤트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다가 가요계의 히트곡들이 정상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고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아이돌그룹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만 생산되고 있는지 답답할 뿐이다. 한 시절 우리들의 가슴을 떨게 만들었던 조동진, 정태춘, 김광석 같은 음유시인들이나 가슴을 뻥 뚫리게 했던 전인권이나 윤도현 같은 로커, 김동률 같은 무한서정을 가진 가수들이 더이상 나올 수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복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것, 그런 것들이 사랑받을 수 있는 대중문화 풍토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