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밥도 빵도 안되는 시

마른 풀들에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마른 풀들에게


1

일찍이 내가

추위 가득한 벌판의 한 구석에서

나무 십자가로 서 있을 때

너희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과의 싸움에서

너희들의 입술은 말라 터지고

마지막 푸른 피 한 방울까지도

흘려 버렸지만

난 부끄러운 알몸조차 가리지 못한 채

윙윙 울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지나면

너희들의 마른 기침은

어둠과 함께 깊어가지만

우리들 사랑의 목마름을 위해서

무수한 바람의 칼날 앞에서도

피흘리며, 피 흘리며

다시 일어나는 의지로

우리들 삶이

갈증과 갈증의 화답이란 것을

깨닫게 한 마른 풀들이여


2

만약 너와 내가

우리들 적인 바람과 눈보라가 잠잠해

고통없이 살 수 있다 하면

우리는 이미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할 뿐

적막한 지상에 마른 그림자 하나 남기지 못한다

무사한 꿈은 마음 한구석에 버려 두고

야윈 어깨와 어깨로

뜨거운 마음과 마음으로

단단한 불씨 하나 만들어

지상의 빛으로 타올라야 하리

거대한 불기둥 아래

새로운 우리들의 나라

우리들의 천국이

다시 세워질 때까지

사랑이 그리워 죽어간 사물의 피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오광수

'밥도 빵도 안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에 흔들리지 않는다구요?  (0) 2015.09.07
해녀  (0) 2015.09.06
초승달 아래  (0) 2015.08.24
  (0) 2015.08.20
화전민의 꿈  (0) 2015.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