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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가을에 흔들리지 않는다구요?

  가을 저녁寺

 

               박정대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나는 걸어서 가을저녁寺에 당도합니다
 
  한 사내가 물거울에 자신의 낯을 비추어보며 추억을 빨래하
 고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잉걸불처럼 타들어가는 개심사 배롱낭구 꽃잎에는 어느 먼
 옛날 백제 처녀의 마음도 하나 들어 있을 테지요

  저녁 예불을 드리던 개심사 범종 소리는 서른두 번째에서 한
 참을 머뭇거립니다 마지막 종소리는 가을 저녁寺로 불어오는
 바람에게나 내어주고요

  가을 저녁寺에 호롱불이 돋는 地上의 유일한 저녁입니다

  한 사내가 연못거울에 어두워지는 낯을 비추어보며 끝내 자
 신이 걸어가 당도할 집을 생각하는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
 저녁입니다 

  나는 걸어서 가을 저녁寺를 내려옵니다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세상 참 고요합니다. 가을저녁寺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나뭇잎들이 파르르 흔들립니다. 둥지 못찾은 저녁새들이 숨죽인 채 종종거리며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다닙니다. 시나브로 나뭇잎들은 가을저녁寺 범종소리에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저리 낯빛이 붉어지는 건 수줍음 많은 처녀이기 때문이겠지요.
 사내들은 추억에 약한 존재들이지요. 이렇게 고요한 가을저녁이면 더욱더 머뭇거립니다. 파란만장했던 사내들조차도 끝내 걸어가 당도할 집 앞에서는 고요하고 투명해집니다. 모두가 가을탓입니다.      
 이런 고요도 너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붉게 타들어가는 처녀의 마음도, 고요하고 투명해진 사내의 가슴도 온전히 가을 안에 있습니다. 밤새 귀뚜라미 소리에 젖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다면 맑은 가을볕에 잠시 말리셔도 좋습니다. 혹, 바지랑대 끝에서 희게 펄럭이는 것들을 보신다면 손이라도 가볍게 흔들어 주시지요.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저녁 아닙니까. 이 가을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 있을 까요?

오광수기자 ok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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