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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댄스음악의 성지 ‘문나이트’ 출신 스타들의 인생유전

 

 

 

 

댄스음악의 성지 문나이트 출신 스타들의 인생유전

 

 

 

                                     현진영

 

 당대를 지배하는 가요 제작자들의 히스토리를 추적하다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클럽이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서울의 밤을 지배하던 이태원 관광특구. 그중에서도 클럽 <문나이트>가 있다. <문나이트>는 약 80여평 크기의 평범한 나이트클럽. 그러나 이곳을 거쳐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9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의 트랜드를 주도한 댄스음악의 성지이자 시발점이 된 곳이 <문나이트>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동명의 댄스뮤지컬로도 제작된 <문나이트>는 얼마전 작고한 서재용씨가 주인이었다.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의 서씨는 이태원에서 <소울트레인>이라는 클럽을 운영하다가 80년대 후반 <문나이트>의 문을 열고 90년대 후반까지 운영했다. 여러사람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문나이트>는 술만 팔고 춤을 추던 단순한 클럽을 넘어서 전국의 춤꾼들이 모이는 경연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춤을 춰서 유명해지면 <문나이트>에 가서 전국에서 모여든 춤꾼들과 그 실력을 겨뤘다. 이곳에서 오디션을 통해 가수들의 백댄서도 뽑는 등 활발한 캐스팅이 이뤄졌기에 춤꾼들에겐 세상 밖으로 나가는 창문 같은 곳이었다.

 

 이처럼 춤이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 프로시대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주한 미군들을 대상으로 방송되던 채널 AFKN이 고정편성하여 방영한 <소울 트레인>이 큰 역할을 했다. 8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음악전문 케이블채널도 없었고, 지상파에서 미국 음악시장의 최신 트랜드를 소개할 리도 없었기에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남녀댄서들의 환상적인 춤을 결합시켜 만든 프로그램인 <소울 트레인>은 교과서나 다름 없었다. ‘남다른 춤’을 꿈꿨던 청소년들은 이 프로그램을 녹화하여 계속되는 반복훈련으로 연습하는 길 뿐이었다. 물론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마이클 잭슨이 몰고온 열풍을 빼놓을 수 없지만 <소울 트레인>이라는 교과서 아닌 교과서가 없었다면 문나이트는 훨씬 늦어졌을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면 <문나이트>의 1세대 가수는 누구였을까? 바로 ‘기역니은춤’으로 유명한 박남정이었다. 88년 데뷔한 박남정은 문나이트 오디션을 통해 ‘박남정과 프렌즈’의 프렌즈 멤버는 양현석(YG엔터테인먼트 대표)과 박철우(전 R.ef 멤버)였다. 말하자면 박남정은 방송사의 무용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호흡하는 백댄서를 고용한 거의 최초의 가수였다. 물론 각 방송사가 쇼무대를 버라이어티하게 꾸미기 위해 전속무용단이나 연하나로 무용단 등 외주무용단을 기용하던 시절이었지만 본격적인 춤꾼과는 거리가 멀었다.
 댄스음악의 성지인 <문나이트>를 주목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프로듀서였다. 198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수만은 방송MC 활동과 가수활동을 겸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인천 월미도에 새로운 형태의 레스토랑 헤밍웨이를 열었다. 그곳을 기반으로 사업자금을 모은 이수만이 꿈꾼 건 한국판 바비 브라운 같은 소울음악이나 힙합을 기반으로한 가수의 발굴하여 음악기획자로 발돋움하는 거였다. 

 그가 <문나이트>를 드나들면서 찾아낸 가수가 현진영이었다. 그당시 문나이트의 대표 춤꾼은 양현석과 이주노였다. 두 사람은 이미 춤꾼들 사이에서 ‘넘사벽’이었다. 양현석은 힙합댄스로, 이주노는 브레이크댄스로 일가를 이뤘다. 그들 사이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현진영은 춤은 물론 노래도 잘 부르는 탁월한 재목이었다. 훗날 이수만은 현진영을 선택한 이유가 춤과 더불어 노래도 잘 부르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SM기획을 세운 이수만은 90년 타이틀곡 ‘야한 여자’와 토끼춤을 앞세운 현진영을 시장에 내놓는다. ‘현진영과 와와’라는 이름으로 강원래와 구준엽을 백댄서로 내세운 팀이었다. 이후 와와의 멤버는 이현도와 김성재(2기), 지누션의 션(3기)으로 이어진다. 모두 <문나이트>에서 활약하던 춤꾼들이었다. 와와의 멤버들이 90년대 힙합과 댄스음악을 주도한 듀스와 클론, 지누션으로 분화됐다는 건 <문나이트>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진영은 1차 대마초 파동으로 큰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활동을 접었다. 다시 재기한 2집 앨범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현진영 고, 진영 고’라는 후렴구가 대유행하면서 소위 대박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수만과 현진영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두근두근 쿵쿵’을 타이틀로한 3집앨범은 당시 선주문만 100만장에 육박했다. 한국 가요의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였다. 그러나 따끈따끈한 앨범을 내놓자마자 현진영은 다시 대마초파동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이수만은 이미 제작한 40만장의 앨범을 폐기처분한다. 그동안 모아놨던 재산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

 <문나이트>의 신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룹 시나위에서 록음악을 하던 서태지는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음악을 위해 춤이 필요했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문나이트>에 가서 양현석을 만난다. 서태지는 양현석을 조른 끝에 수강료를 내고 춤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양현석이 돌연 군에 입대한다. 양현석은 수개월만에 의가사제대하여 이태원으로 돌아와 서태지에게 춤을 가르친다. 아마 양현석이 의가사 제대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면 서태지 아이들의 멤버는 달라졌을 것이다. 서태지는 다시 컴백한 양현석과 또다른 춤꾼 이주노를 양 날개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원래 이름은 ‘서태지 앤 보이즈’였다. 그러나 방송사의 영어표기 불가 원칙 때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됐다. 

 당시 <문나이트>에는 춤꾼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철이와 미애’의 신철과 미애, ‘룰라’의 이상민과 신정환, ‘쿨’의 이재훈, ‘터보’의 김정남, ‘DJ DOC’ 정재용, ‘H.O.T.’의 문희준도 90년대 문나이트의 핵심멤버 리스트에 올릴만한 이름들이다. 이들 중에는 춤보다는 소위 힙합의 4대요소 중의 하나인 디제잉을 전문으로하는 DJ들도 있었다. 훗날 DJ DOC의 제작자로 변신한 신철이나 정재용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3대 기획사 중의 하나인 JYP의 박진영 역시 춤을 배우기 위해 <문나이트>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던 멤버 중의 하나였다. 당대 아이돌음악의 생산기지인 3대 기획사가 모두 그 뿌리를 추적해보년 <문나이트>가 있다는게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대중음악은 트랜드를 먹고 자란다. 60년대에 명동에 쎄시봉이 있었고, 70년대에 통키타 가수들의 명소인 쉘브르가 있었다면 80년대와 90년대 문나이트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홍대앞이나 또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음악의 성소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