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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딸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저 켠에 환한 등불이 켜지는 딸아. 어느덧 십일월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에 젊은 친구들은 할로윈축제로 시끌벅쩍 했다는데 대략 인생의 가을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빠는 쓸쓸함이 절반이었다. 그래서 한 잔 했다. 다시 못올 것들을 호명하면서 말이다.
 요즘 시집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지? 지내놓고 보니 시(詩)는 마치 첫사랑 같은 것이더구나. 기쁠 때나 슬플 때,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 꽃이 지고 황혼이 걸릴 때 문득문득 떠올라 목울대에 걸리는…. 그때마다 울컥하고, 요즘말로 ‘심쿵’하는 게 시였다. 네가 젊음의 한때 그런 시를 마음 속에 담아두는 건 첫사랑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지. 함민복이라고, 아빠가 아는 한국 유일의 전업시인이 쓴 시 중에 ‘긍정적인 밥’이라는 시가 있어. 

 ‘시 한편에 삼만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 국밥이 한 그릇인데 /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 시집이 한 권 팔리면 /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 박리다 싶다가도 /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아빠는 마음 한 켠에 시를 품고 살면서도 ‘더 맛있는 국밥’을 먹으려는 욕심과 게으름 때문에 좋은 시를 쓰지 못했지. 그래도 평생 시를 읽어왔으니 이 가을에 사랑하는 딸에게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으니 그또한 기쁜 일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잖니. ‘사추기’(思秋期)를 지나는 아빠도 붉은 단풍과 지는 낙엽이 공존하는 거리에서 괜스레 마음 설레는 것만 봐도 사내들은 가을을 건너면서 가슴앓이를 하는 것 같구나. 그런데 말이다. 무릇 시인들은 유독 가을에 취약(?)하더구나. 시와 가을과 시인을 묶어서 이야기를 펼치려고 생각들을 떠올려 보니 더더욱 그러하네. 그래서 ‘십일월에 어울리는 시’가 무엇일까 생각을 모아봤다.
 네가 알만한 시들 중에는 가을을 이야기한 시들이 꽤 있지. 고 김현승 시인은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고 노래했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시 중에는 고 김광균 시인의 ‘추일 서정(秋日抒情)’이란 시도 있단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고 노래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가 국어책에 나오면 시를 읽은 맛이 떨어지는 건 아빠만 그런게 아닌 듯 하더라. 왜 은유법이 어떻고 직유법이 어떻고, 시어를 적당한 말로 바꾸고 하는 걸 공부하다보면 시는 온데간데 없고 공부만 남는 셈이지.
 아빠가 읽었던 시 중에서 가을에 딱 어울리는 사랑시를 소개하마. 한창 사랑에 목마른 나이인 내 딸이 매일 매일 사랑이 가득한 나날을 보내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 사소한 일일 것이다 /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 그대를 불러보리라 // 진실로 진실로 /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그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다. 황시인의 아버지가 소설가 황순원 선생인데 부전자전이라고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진 시편들이 정말 많단다. 1958년 11월에 발표했으니 벌써 50년도 넘은 시구나. 그래도 마치 어제 쓰여진 듯 생생한 걸 보면 시처럼 오래 갈 수 있는 언어도 드문듯 하구나.
 이쯤해서 요즘 시 한 편도 감상해보자꾸나. 이병률 시인의 ‘북강변’이라는 시야.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 나는 길을 잃고 /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 한밤중의 이 나비떼는 /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 / 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 길은 막히고 /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내 딸을 사랑한 지 며칠째더라. 대략 계산해도 8천여일이 넘는구나. 이 엄청난 시간을 줄기차게 사랑할 수 있었다니 우린 참 놀라운 사이가 아니냐.   
 나태주 시인의 ‘11월’은 참 절묘하다.
 

 ‘돌아서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시적 상상력을 더해서 사족을 붙이자면 ‘밤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 더욱 그대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쯤 될까. 시치미 뚝 떼고 이렇게 변용시켜서 자신의 이름을 붙여 발표한다면 그게 바로 표절인 셈이지.
 사랑하는 딸아. 네가 너무 호흡이 긴 글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 지나치게 길어졌네. 여기 짧은 시 한 편 소개하면서 마무리 하련다.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민복 ‘가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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