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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뒷담화

'근혜'와 '영자' 사이

 

 

 

 

 ‘근혜’와 ‘영자’ 사이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 하얀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흰구름 솜구름 탐스런 애기구름 / 짧은셔츠 짧은치마 뜨거운 여름 /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불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던 이 ‘사계’는 빠르고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 속에 노랫말이 주는 무게 때문에 슬픔이 듬뿍 묻어나오는 노래다. 70년대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시골에서 올라온 우리의 누이들은 청계천과 구로공단에서 매일 계속되는 잔업에 시달리면서 미싱을 돌렸다. 전태일의 분신이나 YH사건 등 굵직한 노동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개발독재의 깃발 아래 우리 누이들과 형들의 헌신은 피눈물 나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한창 꿈많은 20대 전후의 처녀들이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서 잔업에 지쳐 졸다가 미싱에 손가락을 박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철공소에서 일하던 20대 청년들이 안전장비도 없이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리거나 다리를 절단 당했다.

 

 70년대 초반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면서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산업화시대로 접어들었다. 삼촌들은 월남전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왔지만,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누이들은 하나둘 도시로 향했다. 도시에 나와 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섬유공장이나 전자회사 직공, 혹은 버스안내양이나 식모살이였다. 운 좋은 형들은 누이들이 버는 월급으로 대학을 다녔지만 대부분은 제철소나 건설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또 누군가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가 되어 떠났다. 이래저래 가족은 제자리를 못찾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부평초마냥 떠돌아야 했다.

 그 시절을 그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자’는 결코 행복한 이름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도시의 유혹에 빠지거나 팔다리를 잃은 뒤 밑바닥인생으로 전락하는…. 75년 당시 대학은 시도 때도 없이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극심한 당국의 검열에 시달리던 영화계도 의식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여기에 반기를 든 감독이 하길종 감독(1979년 작고)이었다. 당시 호스티스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최인호는 한 스포츠지에 대학생들의 꿈과 좌절을 담은 에세이 <바보들의 행진>을 연재했다. 연재 시작 때부터 하길종 감독과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집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하길종 감독은 이미 중앙정보부가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고 감시를 하고 있었다. 70년대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검열의 칼날 아래서도 발랄하게 시대를 풍자한다. 가수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 ‘왜 불러’, 김상배의 ‘날이 갈수록’이 영화 전편에 흐르면서 장발단속과 입대, 무기한 휴강 등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병태'와 '영자'가 주인공이지만 결코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던 젊은이들의 풍속도였던 셈이다.

 

 “아, 아파요. 꺾지 마세요. 그냥 보기만 하세요. 향내만 맡으세요.”(꽃순이를 아시나요), “단단한 조가비의 신음인가 분노인가”(가시를 삼킨 장미),“돌아보면 지난날은 눈물 자국이지만… 오늘 밤도 미스 오는 환히 웃는다”(오양의 아파트).
 이런 류의 호스티스 영화들을 줄줄이 탄생시킨 영화가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원작, 김호선 감독)였다. 70년대 한국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무작정 상경한 영자(염복순 분)는 식모로 일하다가 주인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버스 안내양을 거쳐 ‘청량리 오팔팔’ 매춘부로 전락한다. 그나마도 버스 안내양 시절 당한 사고 때문에 한 쪽 팔이 잘려나가고 없어 손님들이 재수 없어 하는 외팔이 창녀다.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창수(송재호 분)는 월남에서 돌아온 목욕탕 때밀이였다. 그는 한 쪽 팔이 없는 영자를 위해 의수를 만들어준다. 

 아직도 창수가 영자를 위해 영업이 끝난 목욕탕에서 정성스럽게 목욕을 시켜주던 장면이 뚜렷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두 사람에게 동네 공중목욕탕은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여하튼 영자는 어쩌면 대한민국을 경제부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영자’와 함께 ‘근혜’를 떠올린 건 좀 엉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영자와 근혜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인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52년생이다. 영자가 식모로 일할때, 근혜도 대학생이었다. 수많은 누이들이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잔업을 하고 있을때 근혜는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공주처럼 잘 자라고 있었다. 개인교사를 두고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면서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청와대에서 가까운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를 뒀을리도 없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공주였던 그녀의 인생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피격(1974년)과 아버지 박정희의 피살(1979년)로 크게 흔들렸다. 이 두 사건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여전히 ‘반공(反共)’과 ‘측근정치’로 남아있다. 

 “(확고한 역사관이)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이 되기도 어렵고 통일이 돼도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교과서 관련 발언을 들으면서 귀를 의심했다. 아, 내가 이상한 선장이 키를 쥐고 있는 배에 잘못 타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내릴 수도 없다. 선장이 배를 빙하지역 한 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데도 하릴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가?

 나는 '근혜'가 대한민국이 아버지가 만든 나라가 아닌 그녀의 친구뻘인 '영자'와 '창수'가 만들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또 초로의 나이가 된 영자와 창수가 꾹꾹 찍어서 대통령이 됐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왜? 그들은 근혜에게 투표했을까? 지긋지긋했던 가난과 공포정치로 점철됐던 과거를 아들딸들이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때문에 ‘독재자의 딸’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투표한 것이다. 근혜가 영자의 깊은 뜻을 헤아린다면 좀더 편히 살 수 있겠다. 손주뻘쯤 되는 어린 학생들이 나라를 걱정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