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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SM 이수만의 흑역사

 이수만과 현진영, 빛과 그림자

 

 

                            이수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가 됐던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카페 <헤밍웨이>를 경영하다가 조용하게 가요기획사 SM기획을 차린 이수만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을 만한 그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고 휘트니 휴스턴의 남편인 바비 브라운 같은 가수였다. 힙합을 기반으로한 소울풍의 노래를 소화하면서 다양한 춤도 능숙하게 출 수 있는 신인이 필요했다. 그는 춤꾼들의 성소로 알려진 이태원의 문 나이트 등을 돌면서 쓸만한 신인을 물색했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현진영이었다. 그는 이미 이태원에서는 탁월한 춤꾼으로 소문난 존재였다. 그러나 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춤꾼 현진영에게서 이수만은 가수로서도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간파했다. 댄스곡을 소화해도 소울이 느껴지는 그의 음색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사실 그 즈음에 이태원의 문나이트는 양현석과 이주노라는 탁월한 춤꾼들이 있었고, 강남 쪽에는 강원래와 구준엽이 있었다. 이수만이 현진영을 선택한 건 춤 뿐만 아니라 보컬로서의 가능성도 감안한 결과였다. 

 현진영의 미션은 이미 현진영을 위해 만들어놓은 힙합풍의 노래 ‘야한 여자’에 밎춰 바비 브라운의 토끼춤을 능가하는 춤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수만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에 감금하다시피 하여 현진영을 트레이닝 시켰다. 현진영과 와와는 춤과 노래의 합체로 바람몰이를 했다. 와와는 훗날 ‘클론’으로 활약하는 강원래와 구준엽, ‘듀스’로 90년대 가요계를 지배하는 김성재와 이현도가 차례로 백댄서 역할을 했으니 ‘현진영과 와와’가 90년대 가요계를 뒤흔드는 전초기지 역할을 한 셈이다. 현진영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곡은 ‘야한 여자’보다는 ‘슬픈 마네킹’에 이르러서였다. 이수만은 당시만해도 언더그라운드 뮤직으로 치부되던 힙합을 가요계 전면에 부상시키면서 야심찬 출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진영은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라다가 아버지의 부도로 방황해야했던 십대 시절이 있었다. 방황하던 시기에 손을 댄 대마초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1집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직후 현진영은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다. 그러나 사태수습에 나선 이수만이 초범이었던 현진영을 석방시키기에 이르른다. 고비를 넘기고 준비한 2집 앨범이 지금도 힙합계의 전설로 남아있는 ‘흐린 기억 속의 그대’였다. 현진영은 2집 무대를 위해 옷에 X자 마크를 크게 새긴 의상을 준비했으며,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크게 히트하면서 소위 X세대의 대명사가 됐다. 힙합 스타일의 곡에 ‘엉거주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춤으로 방송사는 물론 밤무대까지 점령을 했다.

 여기까지는 SM기획과 이수만, 현진영의 성공은 누구도 예상할 수 있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SM은 소위 선점효과를 통해 단숨에 90년대를 풍미할 수 있는 기획사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야심차게 준비한 3집앨범 ‘두근두근 쿵쿵’의 발매를 앞두고 이수만과 현진영의 기억하기도 싫은 흑역사가 시작됐다. 현진영이 다시 필로폰 투약으로 구속된 것이다. 초범도 아니고 재범, 그리고 세인들에게 그 이름이 널이 알려진 뒤였으니 더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만은 선주문을 받아 제작한 40만장의 앨범을 폐기처분해야 했다. 그동안 레스토랑을 경영하면서 차근차근 모아놨던 자금이 하루아침에 바닥났다.

 아마 그쯤에서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SM엔터테인먼트는 없었을 것이다. 훗날 그룹 'S.E.S'가 최초로 일본 진출을 선언한 뒤 도쿄에서 쇼케이스를 가졌을때 기자는 이수만 대표와 도쿄 출장을 함께 갔다. 출장 기잔 내내 공식일정이 빌 때마다 음반매장에 가서 앨범들을 살피다가 필요한 걸 사고, 일본의 매니지먼트 회사 사장에게 디테일한 기획사 경영에 대해 질문하던 그가 떠오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 이수만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