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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뒷담화

유인경 기자를 보내며

 

 

유인경 기자를 보내며

 

 

                                      어느날 편집국에서.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오늘 아침 출근하니 옆자리가 허전하다. 유인경 선임기자가 어제 날짜로 정년퇴직을 해서 경향신문을 떠났다. 몇 차례 이별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닥치고 보니 마치 첫사랑 여자를 떠나보낸 기분이다. 아침마다 '하이, 광수'라며 반기던 여성동지의 부재는 한동안 내 마음을 시리게 할 것 같다. 어제 저녁 가수 조영남 형이 그녀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짜기로(?) 소문난 조영남 형이 자신의 여친그룹 중 최고령인 유인경 기자를 위해서 거한 자리를 마련했다. 평소 출연료 없이는 노래를 안하는 분이 김세환, 남궁옥분 등 가수들을 불러내서 노래도 부르고, 100여명의 초청객들이 암소 등심 스테이크를 배불리 먹도록 해줬다. 한승원 전 감사원장, 김성호 전 국정원장, 정동영 전 장관부터 현직 국회의원, 변호사, 언론인, 방송인 최유라와 최은경 등등 초청객들도 화려했다. 유인경 선임기자는 '무관의 제왕'인 기자로서 가장 성대한 정년퇴임식을 한 이 시대 마지막 기자가 아닐까?

 지난주 영광스럽게도 경향신문 여기자들이 마련한 유인경 선임기자의 퇴임식에 남자기자로서는 유일하게 청일점으로 초대받아 송사를 했다. 전체 여기자 70명-경향 기자의 3분의 1일 여기자다-중 50명이 참석한 모임에서 송사를 하는 영광을 누렸으니 '로또'가 따로없다. 여기 그날 명랑쾌활 버전으로 쓴 송사를 올리면서 내 오랜 동지이자 선배-하긴 외양으로는 내가 오빠다-를 떠나보내는 섭섭함을 달래려 한다.    

 

 유국장, 아니 유선배.

 깊어가는 가을날 저녁, 여기자들이 마련한 당신의 정년을 기념하는 모임에 청일점으로 초대되어 송사를 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오광수의 외모나 인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지난 20여년간 변변치 않은 당신의 ‘호위무사’로 지내면서 큰 오점을 남기지 않고 버틴 결과라 생각합니다. 입사와 함께 옆자리 짝궁으로 시작하여 정년의 순간에도 다시 옆자리 짝궁으로 끝을 맺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도 믿을 수 없습니다. 넉넉히 봐야 입사 10년차 밖에 돼 보이지 않는 최강동안을 가진 유선배가 벌써 정년이라니요. 외모와 체력, 열정을 측정하여 정년을 결정한다면 앞으로 20년은 더 근무할 수 있을텐데…. 아쉽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선배는 경향 69년 역사에서 최초로 정년을 맞는 여기자입니다. 이는 26년간 수많은 안팎의 시련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존버정신’의 승리입니다. 수많은 고비마다 긍정의 힘으로 싸워온 결과라 생각하며 여기 모인 여자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모범적인 사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자로서 방송과 저작을 겸업하면서 방송인이자, 베스트셀러 저자, 명강사로 성공한 뒤 명예롭게 은퇴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처음 유선배를 만났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본인은 늘 자신의 외모를 전원주에 비유하지만 청춘의 한때 당신을 보고 ‘심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아침마다 양손에 이것저것 챙겨들고 쿵쾅거리면서 출근하던 그 모습에서 저는 소피아로렌이나 베아트리체 달, 심지어 안젤리나 졸리도 만났습니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전혜린이나 루이제 린저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내 엉덩이를 툭툭 쳐대면서 성희롱을 일삼는 선배의 못된 손을 만나면서 그 생각을 접었는지도 모릅니다. 선배들이 직장내 성희롱으로 고소하라고 부추길때도 제가 꾹 참은 걸 보면 은근히 그 손길이 싫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유인경과 유인화로 상징되는 경향 여기자에 대해 남자중심 기자사회의 질타와 비아냥이 이어질때 저는 타고난 페미니스트로서, 때로는 운명을 같이한 동지로서 호위무사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 순간 유인경의 눈물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응답하라 1994>의 버전으로 얘기해보죠. 당시 편집국은 원고지에 기사를 쓰다가 버린 파지들이 굴러다니고, 마감때면 너구리를 잡듯 담배연기가 자욱했으며, 대장을 챙기느라 수십번씩 전산실을 오르내리고, 여기저기서 부장들의 고성이 오갔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악명 높은 연예레저부 - 훗날 대중문화부로 바뀜- 시절을 호출해봅시다. 당시 훗날 ‘삼수 브라더스’로 불리는 박XX, 배XX, 오광수가 있었고, 그 사이 유인경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들의 부장은 사건이 나면 옆자리 사회부장보다 더 목소리가 컸습니다. 버스전복사고가 나면 연예인이 탔는지 알아보라고 호통쳐서 사회부보다 먼저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을 파악해야 했고, 지면에 들어가지도 않는 1면기사와 사회면 기사를 수도없이 써야하는 수고를 해야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잠이 없으신 부장이 새벽 한두시에 전화를 걸어서 뜬금없이 이미자의 나이나, 나훈아의 히트곡을 물어온 적은 얼마나 많았는지요. 또 유선배는 정동탕에 가 있는 박XX 선배를 찾기위해 수시로 남탕에 전화를 해야했으며, 일본 후지산 골짜기에 가있는 박선배를 찾아서 전화를 연결하라는 부장의 엄명에 수도없이 전화를 돌렸습니다. 취재를 가다가 오분마다 울리는 부장의 호출 삐삐에 버스를 내려야 했던 게 한두 번입니까. 또 창간 기념일 행사에 연예인들을 동원하느라 돌린 전화 다이얼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입니다. 옆부서에 있던 동료들이 연예레저부 부원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볼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끝내 ‘양아치 같은 기자들’이라는 부장의 막말에 아이라인이 번지도록 눈물을 쏟으며 사표를 쓰겠다는 당신이 기억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나가서 <월간 뻥>이라도 창간해서 먹고살자고 서로를 위로했지요. 그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존버정신’으로 버텼기에 오늘 이 영광스런 순간이 왔습니다.

 

 생각해보니 기자 유인경을 동료로 둔 덕분에 참 행복했습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자 ‘여러가지 문제 연구소장’인 유선배는 자료실을 뒤지지 않아도 될만큼 취재원의 나이부터, 가족관계, 히스토리까지 줄줄이 읊어줬기에 기사쓰기가 수월했습니다. 또 부동산 투자나 증권투자 등 돈버는 일이나 나이트문화를 빼고는 세상의 모든 문제에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는 동료이자 선배였지요. 특히 많은 여기자 후배들의 연애상담과 인생상담을 해주면서도 ‘비밀보장’의 원칙을 지켜나간 영업방침으로 신뢰를 쌓아오기도 했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마약은 물론 술이나 담배도 해본적이 없이 대장정을 마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데 유선배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아 참 골프도 안치고 운전도 못하지요. 또 날마다 장동건이나 정우성 같이 잘생긴 스타들을 만나면서도 단 한 번의 스캔들이나 송사사건도 없이 26년을 버텼으니 그 또한 대단합니다. 게다가 달랑 학사학위로 버티면서 박사보다 더 쉽지 않다는 ‘밥사’를 몸소 실천하면서 수많은 후배들의 영양실조를 막은 공로도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 밖에 나가서 경향신문 기자라고 하면 유인경 기자를 아느냐고 묻는 통에 당혹스럽거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옆자리에서 오래 근무했노라고 얘기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요즘엔 아는 아줌마들이 유선배 사인 좀 받아다 달라는 청탁을 받으면서 우쭐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사라지게 돼서 아쉽습니다.

 

 유선배, 당신은 모진 핍박과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새벽마다 일어나 아침 생방송을 하고, 외동딸을 프랑스 석사로 키웠고, 남편의 흠결(?)을 들춰내 번 돈으로 당당하게 늙어가는 남편을 만들었습니다. 하여 틈틈이 쓴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경향 각지에서 강의요청이 쇄도하고, 방송사마다 출연요청이 끊이지 않습니다. 대개 이런 자리는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퇴직 이후의 막막함으로 다소 쓸쓸하기 마련인데 기쁜 마음으로 선배를 떠나보낼 수 있어 행복한 밤입니다.

 

 각설하고, 여기 모인 여기자들이 써나갈 자랑스런 경향의 역사에 맨 앞페이지를 장식하고 떠나는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많은 여기자들이 유선배의 뒤를 이어서 스타기자로 성장하면서 경향의 이름을 빛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주일 뒤 텅비게 될 옆자리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그 빈자리가 그리울 겁니다. 아침마다 ‘하이 광수’라고 인사하던 당신이 없는 정동의 아침이 두렵습니다. 이자리에서 명예 밥사학위를 드릴 터이니 앞으로도 웬만하면 정동에 와서 점심을 먹도록 하시지요.

 자, 전반전 휘슬이 울렸네요. 벌써부터 후반전이 가다려집니다. 잘 가세요. 유선배.  


        

2015년 11월

오광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