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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서울의 봄, 조용필 창밖의 여자

 

 

 

 

 

 

 

 

 

 

노래의 탄생 /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년 서울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땅이었다. 박정희의 퇴장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가 했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암울한 시간이 찾아왔다. 올해로 노래 인생 50주년을 맞은 조용필에게 1980년은 격동의 역사 만큼이나 극적인 한 해였다. 8군 시절 대기실에서 피웠던 대마초가 문제가 되어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로 긴 무명의 터널에서 벗어나온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남산에 끌려가 뭇매를 맞던 기억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전국 명찰을 다니면서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목소리를 단련했다.

 1979년말 대마초 가수의 해금 조치와 동시에 동아방송 안평선 PD가 연락해 왔다. 곧 시작할 라디오극 <창밖의 여자>의 주제가를 만들고 불러달라는 요청이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 나를 잠들게 하라.’ 드라마 작가인 배명숙 씨가 건네준 노랫말은 조용필의 가슴을 뛰개 했다. 꼬박 닷새 동안 한 끼도 먹지 않은 채 작곡에 전념했다. 설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맴 돌던 악상이 술술 풀려나왔다. 악보를 들고 동아방송 녹음실로 뛰어갔다. 녹음실 밖에 있던 안 PD와 배 작가가 노래를 들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피를 토하듯 이어지는 한 섞인 노래는 듣는 이를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구레코드는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하는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단발머리’, ‘한오백년’,‘고추잠자리’, ‘미워 미워 미워등 버릴 곡 하나 없는 명반이 탄생했다. 단일 앨범으로 1백만장 이상이 팔려 나간 최초의 앨범이기도 했다. 그 해 조용필은 TBC(언론 통폐합으로 KBS가 됨)가 주는 최고 인기가수상을 받았고, 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 창밖의 여자로 금상을 받았다. ‘가왕의 서막이었다.

 5·18 광주항쟁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기에 한맺힌 외침을 담은 조용필의 노래가 대중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이다. 조용필 역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유독 많았다고 회고한다. 조용필에게 와신상담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태어날 수 없는 노래가 바로 창밖의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