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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3- 한국전쟁과 대중음악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꾼다. 우리에게도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수 많은 희생자와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 상처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좀체로 극복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때 부산은 임시수도였다. 평소에는 서울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우리나라 제1의 항구도시다. 그런 도시가 전쟁 때문에 피난민으로 차고 넘치는 도시가 된 것이다. 부산은 평양이나 서울을 떠나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 임시로 정착했던 도시다. 기록에 의하면 피난시절 도미도레코드사, 미도파레코드사 등 서울에 있던 레코드사들이 부산이나 대구로 내려가서 음반을 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문화는 침체됐지만 용케도 노래를 만들고, 레코드도 제작한 것이다. 당시의 노래들은 대부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 전장으로 인.. 더보기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2-일제강점기, 이난영과 남인수의 사랑과 노래 대중음악은 사회의 거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스타가 배출됐고, 대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노래가 즐겁고 행복한 얘기를 담고 있을 리 없었다. 또 일본 엔카(演歌)의 영향을 받아 슬로풍의 단조에 이별을 노래한 곡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가수이자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가 이난영과 남인수다. 남녀 가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음악을 일별해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난영은 누구인가? 그녀는 일본강점기 기생 출신 가수들과는 달리 모던한 재즈풍의 음악으로 일찍이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여가수였다. 이난영이 활동하던 1930년대는 당연히 레코드회사가 스타를 발굴하고 배출하던 시기였다. 오케레코드, 콜럼비.. 더보기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동반 자살 우리네 삶에서 어떤 사건은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바뀐다.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맛본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사건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역사의 흐름이 바뀌면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의 운명도 바뀐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대중문화가 근래 들어서 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그 역사 속에서 결정적 사건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을지도 모른다. 지난 100년 역사 속에 변곡점이 됐던 대중문화계 사건과 사고를 짚어본다. 단순한 사건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대중들은 자극을 얻거나 변화를 택한다. 그 결정적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1920대 발행되던 여성지 의 표지. 윤심덕은 당시 손꼽을 만한 신여성.. 더보기
나훈아, 조영남, 조용필이 한 무대에? 가수 조용필과 나훈아, 조영남이 한 무대에 선다면? 정말 꿈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가왕의 반열에 오른 세 가수가 한 무대에 서는 건 불가능 하다. 더군다나 나훈아와 조용필은 그들의 콘서트에서도 게스트를 세우는 법이 없다. 과거 라이브에이드 공연이나 위아더월드 같은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만들면 이들 대형가수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여전히 현장에서 파워풀한 공연을 펼쳐보이는 스타들이지만 함께 무대에 서기에는 음악적 공통분모가 적고, 각자의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과거 사진들을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다가 1982년 5월에 전남 광주에서 이들 세명의 스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이리저리 확인해 본 결과 이 사진은 그 당시 광주.. 더보기
서울의 봄, 조용필 창밖의 여자 노래의 탄생 /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년 서울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땅이었다. 박정희의 퇴장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가 했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암울한 시간이 찾아왔다. 올해로 노래 인생 50주년을 맞은 조용필에게 1980년은 격동의 역사 만큼이나 극적인 한 해였다. 미8군 시절 대기실에서 피웠던 대마초가 문제가 되어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로 긴 무명의 터널에서 벗어나온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남산에 끌려가 뭇매를 맞던 기억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전국 명찰을 다니면서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목소리를 단련했다. 1979년말 대마초 가수의 해금 조치와 동시에 동아방송 안평선 PD가 연락해 왔다. 곧 시작할 라디오극 의 주제가를 만들고 불러달라는 요청이었다. .. 더보기
천상천하 나훈아 천상천하 나훈아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11년 만에 펼쳐지는 나훈아 콘서트가 코 앞이다. 여기저기서 티켓 구할 수 없냐는 문의가 쇄도하지만 순식간에 매진된 티켓이 남아있을 리 없다. 오래 전 일이지만 나훈아와는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도 하고, 공연도 보러가면서 친분을 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세상의 관계가 그렇듯이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던 시절의 일이지 그 이후엔 소원해 졌다. 게다가 나훈아의 잠적이 강산이 변하는 시간만큼 흘렀으니 나 역시 나훈아의 무대와 근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또 나훈아를 둘러싼 세간의 호기심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루머에 대해 한 번쯤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나훈아는 기자한테 구차한 변명을 하거나 대답을 회피하면서 있는 사실을 숨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더보기
김완선, "이장희 선배가 내 인생의 멘토죠." "이장희 선배가 내 인생의 멘토죠."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그녀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조 섹시디바’는 엄정화나 이효리, 현아와 같은 걸출한 후배 섹시 여가수가 탄생할 때마다 그녀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였다. ‘한국판 마돈나’ 역시 춤과 노래를 겸비한 댄스여가수인 그녀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또 그녀는 ‘10대 댄스여가수의 효시’였다. 데뷔가 열일곱살이었으니 그 나이 또래 가수 중에는 단연 으뜸이었다. 80년대부터 90년대 군생활을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그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통령’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그녀의 이름 앞에 ‘방부제 미모’라는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한창 바쁠 때는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헬기를 띄웠던 핫한 여가수였고,.. 더보기
추자, 미조, 인희. 그녀들의 귀환 추자, 미조, 인희. 그녀들의 귀환 가수 박인희. 경향신문 사진부 그녀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라는 시구처럼 그녀들이 거울 앞, 아니 무대 앞으로 귀환했다. 김추자와 정미조, 박인희. 사실 대중들로부터 한동안 잊혀졌던 그들이었다. 젊은날 각기 다른 색깔로 노래하면서 인기를 얻었던 이들 여가수들은 무려 30여년의 세월동안 대중들과 거리를 두고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살아왔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컴백한 것은 김추자였다. 70년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김추자의 인기는 대단했다. 소위 신중현 사단의 대표주자였던 김추자는 특유의 비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는 물론, 파격적인 의상과 섹시한 춤으로 젊은층들을 사로.. 더보기
신중현이 말하는 '미인' 탄생 비화 신중현이 말하는 '미인' 탄생 비화 검열에 저항한 신중현과 엽전들의 2집앨범 재킷사진. 왼쪽부터 이남이, 신중현, 권용남 “그 당시에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자주 다녔어요. 공연장마다 미인들이 많이 왔죠. 한창 젊을 때니까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미인은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로망이죠. 내가 자꾸 보게 되는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구나 해서 노랫말로 쓰게 됐어요.” 일흔살이 훨씬 넘은 노가수는 청춘의 한때 공연장을 찾아와 눈길을 끌던 미인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냈다. 그렇게 쓰여진 노랫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노랫말이라니. 74년 8월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발표한 첫앨범의 수록곡 ‘미인’은 한국 록의 역사를 .. 더보기
결국 ‘마돈나’를 못보고 말았다 결국 ‘마돈나’를 못보고 말았다 허브 릿츠의 사진 마돈나. 허브릿츠 재단 제공 팝스타 마돈나가 지난 4일(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에서 월드투어의 일정으로 펼쳐진 공연 도중 앙코르곡을 부르면서 대만 국기를 어깨에 걸쳤다가 논란을 불러왔다는 외신을 접했다. 일부 언론은 제2의 ‘쯔위사태’로 비견하기도 했다. 지난해 마돈나가 새 앨범 발표를 기념하며 10번째 월드투어에 나서면서 “오세아니아, 아시아 지역 일정도 곧 공개할 것”이라고 밝힐 때만 해도 그녀의 첫 내한공연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대만까지 오면서도 한국땅에는 오지 못했다. 마돈나는 록그룹 U2와 더불어 ‘내한공연을 하지 않은 마지막 팝스타’로 꼽힌다. 그는 1985년 ‘더 버진 투어’ 이후 9번의 월드투어를 펼쳤으며, 이중에.. 더보기
일어나라, 조덕배 일어나라, 조덕배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tvN드라마 의 한 장면. 덕선과 택이가 키스신을 연출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환적 분위기에서 펼쳐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맞춤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그 장면에서 흐르는 노래가 조덕배의 명곡 ‘꿈에’였다.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 이름 모를 너를 나는 못잊어 /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 지난 꿈 스쳐간 여인이여 / 이 밤에 곰곰히 생각 해보니 / 어디선가 본 듯한 바로 그 모습 / 떠오르는 모습 잊었었던 사랑 / 어느 해 만났던 연인이여 / 어느 가을 만났던 사람이여 / 난 눈을 뜨면 꿈에서 깰까봐 / 나 눈 못뜨고 그대를 보네 /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 오늘 밤에 그대여 와요.‘ 나는 젊은 청춘 남녀의 키스신 때문이 아.. 더보기
김광석과의 마지막 인터뷰 김광석과의 마지막 인터뷰 대구 김광석거리, 고 김광석의 동상. 경향신문 사진부 1995년 8월, 대학로 학전소극장. 불과 200석 남짓의 소극장에 발디딜 틈없이 관객들로 가득찼다. 보조의자에 앉아서라도 공연을 보겠다는 팬들의 성화에 작은 소극장의 계단에도 보조의자가 놓여졌다. 객석의 관객들은 20대와 30대 초반이 주류를 이뤘고, 남성팬보다는 여성팬들이 훨씬 많았다. 그때 김광석은 소극장 1천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조명이 밝아지면서 그가 하모니카 전주를 시작했다. 술렁이던 객석은 이내 조용해지고 하모니카 소리보다 더 슬프고, 아름답고, 때로는 힘이 넘치는 김광석의 노래가 이어졌다. 대부분 김광석의 열혈팬이었지만 처음 그의 라이브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음악으로 .. 더보기
최인호세대와 ‘이생망’ 사이 최인호세대와 ‘이생망’ 사이 영화 포스터 요즘 유행어 중 하나가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어)이란다. 그런데 이 유행어의 근원지가 20대 청년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보이스 비 엠비셔스(Boys be ambitious)’를 외쳐도 모자랄 젊은층들 사이에서 이처럼 자괴적인 말이 유행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이다. 그 대부분의 책임은 나와 같은 기성세대에 있다는 건 피할 수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위로를 한들 ‘삼포세대’인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빛나는 청춘의 한때를 구가했던, 지금은 고인이 됐거나 장년층에 접어든 그네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밥 세끼 먹기가 쉽지 않았던 70년대에 불같은 열정으로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한때를 구가했던.. 더보기
신중현의 탁월한 여가수들 신중현의 탁월한 여가수들 신중현,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비틀즈가 서양 팝음악 역사의 분기점이라면 신중현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분기점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은 신중현 이전의 음악과 신중현 이후의 음악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여명기 한국대중음악은 신중현으로 인해 눈뜨고, 신중현으로 인해 발아했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세계 음악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60년대 한국땅에도 신중현과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있었다는 건 기이한 일이다. 신중현의 출발은 소위 미8군 무대에서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주둔해오던 미군들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만 하고 있기에는 피가 뜨거웠다. 그러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대중음악으로는 그들의 욕구를 달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주한 미군들이 여가를 위해 출입했던.. 더보기
박진영, ‘춤에 미쳐 인생 조진 녀석’ 박진영, ‘춤에 미쳐 인생 조진 녀석’ 박진영,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지금은 JYP엔터테인먼트를 이끌면서 가수이자, 제작자, 프로듀서, 작사가, 직곡가, 방송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박진영이 '춤에 미쳐 인생 조진 녀석'이었다면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보면 무명시절 그런 말을 들었던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박진영은 소위 스카이로 불리는 대학에 입학한 수재였다. 90년초 우수한 성적으로 연대 지질학과에 입학했으니 요즘 말하는 ‘엄친아’였다. 그러나 고교시절부터 박진영은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팔방미인이었다. 고등학교때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한 박진영은 각 반을 돌면서 춤을 추는 유세로 학생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일찌감치 이태원의 클럽에 출근하면서 익힌 춤솜씨를 학생회장 .. 더보기
SM 이수만의 흑역사 이수만과 현진영, 빛과 그림자 이수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tvN의 드라마 의 무대가 됐던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카페 를 경영하다가 조용하게 가요기획사 SM기획을 차린 이수만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을 만한 그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고 휘트니 휴스턴의 남편인 바비 브라운 같은 가수였다. 힙합을 기반으로한 소울풍의 노래를 소화하면서 다양한 춤도 능숙하게 출 수 있는 신인이 필요했다. 그는 춤꾼들의 성소로 알려진 이태원의 문 나이트 등을 돌면서 쓸만한 신인을 물색했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현진영이었다. 그는 이미 이태원에서는 탁월한 춤꾼으로 소문난 존재였다. 그러나 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춤꾼 현진영에게서 이수만은 가수로서도 탁.. 더보기
신승훈은 원래 ‘얼굴없는 가수’였다 신승훈은 원래 ‘얼굴없는 가수’였다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가수 신승훈이 11집 의 수록곡 프리뷰 영상을 공개하면서 오랜 침묵에서 깨어났다. 발라드 가수의 대명사가 된 신승훈이 원래 ‘얼굴없는 가수’였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90년 내놓은 첫앨범 가 KBS 에서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을 차지하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또 데뷔앨범이 70여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데뷔와 함께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타가수로 발돋움했는데 얼굴없는 가수라니…. 신승훈은 대전의 다운타운가에서 노래하던 통기타 가수였다. 무명시절 그는 다운타운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팝송은 물론 가요에 이르기까지 800여곡의 레파토리를 준비할만큼 철저한 가수였다. 여성팬들에게 최적화된 목소리로 많은 ‘광팬’들을 몰고 다녔다. .. 더보기
조용필과 아이들, 방배동 노래방습격기 가요계의 맏형 조용필, 경향신문 사진부 조용필과 아이들, 방배동 노래방습격기 벌써 10년도 넘은 2004년의 일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날 저녁에 서울 방배동 조용필 형의 빌라에서 그와 마주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 출신이자 ‘삐삐밴드’ 등 재기발랄한 록음악을 제작하여 세상에 내놓은 송홍섭씨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들른 조용필 형의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예전 같으면 형수인 안진현씨가 손수 끓인 김치찌개에 소주를 내놓으면서 조금만 드시라고 했을 터인데 황망간에 세상을 뜨셨으니 넓은 집이 더욱 썰렁해 보였다. 일하시는 아주머니도 퇴근한 뒤였기에 용필이 형이 냉장고를 주섬주섬 뒤져서 김치며 밑반찬을 늘어놓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서 나눈 얘기도 늦가을의 쓸쓸한.. 더보기
꿈꾸는 민물장어, 신해철 생전의 신해철,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꿈꾸는 민물장어, 신해철 2009년 초겨울이었다. 형 저녁에 뭐해요? 술이나 한 잔 하시죠? 신해철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일을 마친 뒤 약속장소인 강남의 한 바로 갔다. 기자가 그것도 데스크가 서둘러 일을 마쳤지만 밤 9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이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신해철은 반갑게 나를 맞았다. 그무렵 신해철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당시 정말 많은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했지만 유독 신해철의 슬픔과 분노는 길고도 거칠었다. 그날 우리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기자생활동안 그를 인터뷰할 때마다 거칠지만 논리정연하게 솓아내는 말들을 정리하면서 그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익히 아는 터였다. 그날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 더보기
방황하는 청춘들의 암구호, 김현식 영원한 청춘으로 남은 김현식,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방황하는 청춘들의 암구호, 가객 김현식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 발길에 부딪치는 사랑의 추억 / 두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이여. / 이제와 생각하면 당신은 / 내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 나에게 심어 주었죠.’ 늦가을이 되면 늘 생각나는 가수와 노래가 있다. 그 이름 김·현·식, ‘사랑했어요’다. 지금은 명반으로 기억되는 그의 2집앨범에 수록된 이 노래는 그의 다른 노래들과 사뭇 다르다. ‘어둠 그 별빛’이나 ‘바람인 줄 알았는데’ 등이 수록된 2집 앨범 속 김현식의 보이스는 특유의 스크래치로 거칠게 포효하는 느낌의 창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밀리언셀러로 남은 6집 수록곡이나 그때 불렀던 .. 더보기
문산 세탁소집 아들 윤도현 1997년 당시 윤도현밴드 멤버들. 거칠지만 당당했던 윤도현, YB 20년 역사를 쓰다 가수 윤도현이 이끄는 록밴드 YB가 20년이 됐다. 대단하다. 이 나라, 이런 음악풍토에서 록밴드가 20년을 버티다니. 95년이었다. 야근을 하면서 편집국으로 배달된 신보들을 듣다가 한 남자 신인가수의 앨범에 눈길이 갔다. 윤도현의 ‘타잔’을 그렇게 만났다. 거침이 없는 싱싱한 보이스로 쉬지 않고 달리는 그의 노래에서 야성의 힘이 느껴졌다. 게다가 노랫말도 묵직하면서도 경쾌했다. 인터뷰 요청을 하고 신문 편집국에서 처음 만난 윤도현은 스물셋 싱싱한 청년이었다. 막 육군 단기병으로 제대를 했기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밤톨머리를 한 그가 참 씩씩하게 느껴졌다. “노랫말에 무게를 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대중들과 더불어 .. 더보기
가을비 그리고 ‘가을비 우산 속에’ 가수 최헌 가을비 그리고 ‘가을비 우산 속에’ 비오는 봄날에 박인수의 ‘봄비’가 있다면 가을비 내리는 날엔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에’가 있다. 누구나의 가슴 속에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각나는 노래 한 곡이 있겠지만 이렇게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엔 ‘가을비 우산 속에’가 절로 떠오른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 나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갔나 /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가을비 우산 속에’는 최헌이 1978년 발표한 4집 솔로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최헌은 허스키한 보이스의 매력에 ‘뽕끼’가 가미된 이 노래로 70년대말 방송사의 10.. 더보기
댄스음악의 성지 ‘문나이트’ 출신 스타들의 인생유전 댄스음악의 성지 문나이트 출신 스타들의 인생유전 현진영 당대를 지배하는 가요 제작자들의 히스토리를 추적하다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클럽이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서울의 밤을 지배하던 이태원 관광특구. 그중에서도 클럽 가 있다. 는 약 80여평 크기의 평범한 나이트클럽. 그러나 이곳을 거쳐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9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의 트랜드를 주도한 댄스음악의 성지이자 시발점이 된 곳이 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동명의 댄스뮤지컬로도 제작된 는 얼마전 작고한 서재용씨가 주인이었다.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의 서씨는 이태원에서 이라는 클럽을 운영하다가 80년대 후반 의 문을 열고 90년대 후반까지 운영했다. 여러사람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는 술만 팔고 춤을 추던 단순한 클럽을 넘어서 전국의 춤꾼들이 모.. 더보기
가을을 여는 노래, 가을편지의 탄생비화 연극연출가로 변신한 김민기.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가을을 여는 노래, 가을편지의 탄생비화 아침 출근길 가을하늘이 눈 부시다. 올핸 유난히 여름이 무더워서였는지 성큼 다가온 가을이 반갑다. 가을이 되면 한 번씩 읊조리는 노래가 있다. ‘가을편지’가 그것이다. 사는게 팍팍한 요즘 가을도 편지도 구닥다리가 된 느낌이지만 가을을 여는 노래로 이만한 노래가 있을까 싶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시인 고은의 시에 스무살 청년 김민기가 곡을 .. 더보기
대중음악계의 돈키호테, 이두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대중음악계의 돈키호테, 이두헌 80년대 중반 당시 잘나가던 지구레코드에서 내가 근무하던 잡지사로 보내온 LP음반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풋풋한 젊은이들로 결성된 다섯손가락이라는 그룹의 데뷔앨범이었다. 집에 가져가서 무심결에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음악을 듣다가 나는 허리를 곧추 세웠다. 아 이게 뭐지?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과 ‘새벽기차’ 등 범상치 않은 제목을 단 노래들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록을 기반으로 포크를 가미한 노래들은 리듬과 멜로디가 풍성했으며, 노랫말은 너무도 서정적이고 감미로웠다. 가사 한 편을 옮겨 적어놓으면 한 편의 잘 쓰여진 시였다. 그 시절은 캠퍼스 밴드의 열풍이 불어올 때였다. 전인권이 이끄는 들국화와 김창완이 동생들과 만든 산울림의 영향력이 막강했으며,.. 더보기
그 많던 DJ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그 많던 DJ들은 어디로 갔을까 예전에 방영했던 윤석호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에는 1970년대 음악다방 ‘세라비’가 등장한다. 극중 이동욱(김시후 분)은 의학을 전공하는 명석한 두뇌에 훤칠한 외모, 재치 있는 말솜씨까지 갖춘 세라비의 인기 DJ다. 장발머리와 나팔바지로 한껏 멋을 낸 이동욱의 캐릭터를 스타벅스와 카페베네에 길들여진 요즘 세대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 시절, 음악다방이 있었다. 뮤직박스 안에서 리퀘스트를 받아 턴테이블에 음반을 걸고, 멋진 멘트로 처녀들의 가슴을 뒤흔들던 DJ는 그 시절의 꽃이었다. 처녀시절 음악다방 DJ를 짝사랑하여 매일 음악다방에 출근했다는 아줌마들의 사연이 요즘도 라디오 방송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린다.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음악다방에 가면.. 더보기
노래, 때로 시보다 아름다운 사진 경향신문 포토뱅크 노래, 때로 시보다 아름다운 -대중가요 노랫말의 시적 감수성 분석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Before it.. 더보기
정태춘·박은옥 “세상의 명랑함이 불편해” 10년 만에 새 앨범 정태춘(58)의 노래는 서사(敍事)의 다른 이름이다. 한때 그의 노래는 투쟁이었고, 반동이었다.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북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박은옥(55)이 더해지면 정겨워진다. 30년 넘게 기타를 들고 세상을 노래해온 부부 가수. 마치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원앙새 한 쌍을 닮았다. 이후 10년 만에 이들 부부가 11집 앨범 를 내놓았다. 2002년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많은 사람들을 아쉽게 했던 정태춘이 다시 기타를 고쳐잡고 쏟아낸 노래들이어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앨범이다. 지난 주말 서울 마포구 합정동 다음기획 사무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정태춘은 진지함 속에 여유가 묻어났고, 박은옥은 ‘명랑소녀’ 같았다. 정태춘은 다시 노래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순전히 “박은.. 더보기
울림이 빠진 K팝 걸그룹 원더걸스의 신곡 뮤직비디오가 공개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수 150만건을 돌파했다. 남성 아이돌그룹 2PM의 일본 공연티켓 10만장이 예매 1분 만에 매진됐다. 그룹 빅뱅은 ‘2011 MTV 유럽뮤직어워드’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을 물리치고 월드 와이드 액트상을 수상했다. 연일 들려오는 한류스타들의 뉴스는 한결같이 놀라운 소식뿐이다. 그 인기가 바람 만난 산불처럼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번져가고 있다. 사진제공: SM엔터테인먼트 | 경향신문DB 10여년 전인 1999년 초 기자는 일본 도쿄에 출장을 갔었다. 당시 한국에서 인기가 높던 걸그룹 S.E.S의 일본 진출을 위한 쇼케이스 취재차 간 거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 알려진 한국가수는 조용필을 비롯해 현지에서 활동하던 김연자와 계은숙 정도. SM.. 더보기
조용필과 가을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에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 조용필 ‘바람의 노래’ 일부 가을은 조용필과 함께 깊어간다. 조용필의 노래는 유독 가을을 닮았다. 그의 노래에서는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나고, 단풍나무 숲 사이 작은 오솔길도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가을산 메아리를 닮았고, 노랫말에서는 시인의 정서가 듬뿍 묻어난다. 격정적이고, 달콤하며, 사색적이다. 나는 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