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노>는 오래 잔영이 남는 영화다. 제인 캠피온 감독과 홀리 헌터가 주연한 이 영화는 90년대 개봉한 영화지만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19세기말 20대 미혼모 에이다(홀리 헌터 분)는 사생아 딸과 함께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뉴질랜드 땅에 도착한다. 여섯 살 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한 에이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는 피아노와 딸 플로라 뿐이다. 그러나 모녀를 데려가기 위해 해변가에 온 남편 스튜어트는 피아노를 해변가에 버려둔다. 집에 피아노를 둘 자리가 없다는 이유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치고 싶을 때면 해변으로 나와 건반을 두드린다. 영화 속 촬영지가 바로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 오클랜드 서쪽에 위치한 피하 비치다.
오클랜드 주도로인 1번 하이웨이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보면 마치 한계령을 넘는 듯한 길들을 만난다. 뉴질랜드의 길들은 널직널직한 맛이 없다. 대부분 2차선 도로로 운전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운전석이 우리와 달리 오른쪽에 있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긴 고갯길을 올라서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피하 비치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뷰 포인트를 만날 수 있다. 영화 속의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오클랜드에서 한 시간 정도면 피하비치에 닿을 수 있어서 접근성도 좋다.
오클랜드의 서해안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동해안과 비슷하다. 반면 오클랜드의 동해안은 마치 서해 바다를 연상케 한다. 피하 비치도 파도가 높고 물은 파랗다 못해 검다. 화티푸, 카레카레, 피하, 베델스, 그리고 무리와이 등 서해안의 해변들은 모두 세상과 동떨어진 무인도의 해변을 연상케 할 정도로 조용하다. 이들 해변들이 오클랜드 서쪽으로 길게 형성돼 있다.
피하 해변에 도착했지만 어디에도 영화 <피아노> 촬영지라고 선전하는 간판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뉴질랜드인들의 환경보호에 대한 정책이나 행동은 다른 나라에서 바라보면 유난스럽다. 그 유명한 영화 시리즈 <반지의 제왕>은 주로 뉴질랜드에서 촬영했지만 뉴질랜드 정부는 촬영이 끝난 뒤 원상복구를 하는 조건으로 허가했다. 그 어디를 가도 여기가 <반지의 제왕> 촬영지임을 알리는 간판이나 흔적이 없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서 영화 <피아노>의 배경이 된 시대와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정도다. 바닷가에 인접한 산속에 여기저기 집들이 들어서 있다는 것만 빼면 영화에서 보던 화면과 똑같다.
해변으로 걸어나가면 우선 검은 모래가 인상적이다. 거의 밀가루 같은 느낌의 부드러운 모래다. 해변의 길이가 약 2㎞가 넘는다. 파도가 거칠기 때문에 매년 여름이면 익사사고도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모험을 즐기는 서퍼들이 전 세계에서 서핑을 즐기러 모여드는 해변이기도 하다.
섬나라인 뉴질랜드 해변들은 전 세계 어느 해변보다도 넓으면서도 다양한 풍광을 자랑한다. 그러나 관광지를 연상하고 먹거리를 챙겨가지 않으면 끼니를 건너뛰기 쉽다. 대부분의 해변에 흔한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이 없기 때문이다. 피하 비치 역시 파도 치는 해변 어디에도 전망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이 없다.
조용히 이쪽 해변에서 저쪽 해변으로 걷다보면 파도소리와 함께 피아노 선율이 들리는 듯 하다. 피하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레카레 비치 역시 화산활동으로 생긴 산들과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이곳 서쪽 해안은 바다낚시와 트레킹으로도 유명하다. 서쪽 해안의 비치들은 수 일간의 하이킹 코스인 힐러리 트레일(Hillary Trail)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의외로 산길이 깊고 험해서 지리를 잘 아는 사람과 동반해야 한다.
오클랜드 내에도 유명 관광지들이 많지만 피하 해변은 꼭 한 번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은 해변이다. 영화 속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가 해변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 때문일까. 마치 천국의 해변에 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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