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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좋은 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가을하늘을 떠돌던 두 개의 별이 만나 / 초저녁 환한 달빛 아래 빛나는 이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참 먼 길 돌아왔습니다 / 그 사이 개나리는 피고지고, 단풍잎은 또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요? / 몇 천의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는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시작된다는 걸 / 왜 이제야 알게 됐는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렇게 진득한 사랑 시작했으니…. / 모닥불처럼 훌훌 타오르고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 폭풍우처럼 밀려와 나무들을 뽑아버리는 그런 사랑도 말고 / 시골집 안방에 놓인 화롯불처럼 은근하고 뜨거운 사랑 / 막 쪄내서 콩고물에.. 더보기
[아이콘, 그때 그 시절]③흑백TV 시대의 영웅들 금성TV를 기억하는가. 1966년 이 땅에 첫선을 보인 요술상자의 이름이다. 지금의 LG가 만든 흑백TV는 고단한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70년 TV 보급대수가 30여 만대 뿐이었으니 한 동네에 한두대의 TV가 고작이었다. 집에 TV가 있다는 건 부의 상징이었고, 그것은 곧 권력이었다. 어린시절 어른이건 아이건 TV를 보기 위해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다. TV가 있는 집의 아이는 평소 친한 친구만 ‘입장’시켰다. 여름날 저녁 시골마을의 안마당에 TV를 내놓고 온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TV를 보는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시골마을 중요한 프로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동네 만화가게에서 돈을 내고 봐야만 했다. 타잔과 형사 콜롬보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필시 .. 더보기
[아이콘, 그때 그시절]①1970년대의 이소룡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변두리극장, 이본동시상영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1973)이라는 영화였지만 제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스 리, 이소룡을 그쯤에서 만났다. 바야흐로 이 땅에는 새마을운동으로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난무했지만, 여전히 보릿고개 넘기가 힘들었던 시기였다. 머리에 기계독이 오른 까까머리 중학생, 여드름 투성이의 고등학생들은 저마다 2편 동시상영관으로 몰려갔다. 당시만 해도 소위 개봉관에 학생들이 출입하는 건 자유롭지 못했기에 동시상영관이나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극장은 학생들의 명소였다. 더군다나 이소룡의 영화는 미성년자입장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150원만 내면 매일 체육선생에게 얻어터지고, 지긋지긋한 수학공식을 외워야 했던 현실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 더보기
명태 덕장에서 명태 덕장에서 강문숙 대설주의보 해제 되던 날, 대관령 덕장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백색의 골짜기 가장 높고 추운 곳 수천의 부처가 기립해 있었다. 마음 비웠다는 말 이보다 저 정직할 수 있을까. 물살이 키워온 내장 버리고 딱딱해진 혓바닥, 짜부라진 눈으로 기다리는 극락세상. 아직 멀었다, 멀었다, 쏟아지는 설법처럼 해풍에 젖은 햇살. 네 뼈에 살 입힌 곳 북해였다구? 그럼 동해는 네 지느러미 간질이며 놀던 곳으로 솟구쳐 오르고 싶었던 날들 푸른 수초 사이 미끄럽던 사랑 기억 속에 가두면 향처럼 피어오르는 이 삶의 비린내여. 이제 인간의 바다에서 해탈하리니 가지런히 싸리 쾌에 꿰인 채 황태,골태…… 바람태가 되면 또 어떠리. 一시집 `탁자 위의 사막'(문학세계사) 생태, 명태, 황태, 북어. 지금 비록 .. 더보기
정태춘·박은옥 “세상의 명랑함이 불편해” 10년 만에 새 앨범 정태춘(58)의 노래는 서사(敍事)의 다른 이름이다. 한때 그의 노래는 투쟁이었고, 반동이었다.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북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박은옥(55)이 더해지면 정겨워진다. 30년 넘게 기타를 들고 세상을 노래해온 부부 가수. 마치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원앙새 한 쌍을 닮았다. 이후 10년 만에 이들 부부가 11집 앨범 를 내놓았다. 2002년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많은 사람들을 아쉽게 했던 정태춘이 다시 기타를 고쳐잡고 쏟아낸 노래들이어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앨범이다. 지난 주말 서울 마포구 합정동 다음기획 사무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정태춘은 진지함 속에 여유가 묻어났고, 박은옥은 ‘명랑소녀’ 같았다. 정태춘은 다시 노래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순전히 “박은.. 더보기
오광수의 오솔길 3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죽음’은 벗어놓은 양말짝처럼 초라하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벗어놓고 맨발로 떠나는 마지막 길. 폭력과 광기의 생 앞에서 흔들리던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으로 평등해진다. .. 더보기
오광수의 오솔길 2 봄꽃 /김윤환/ 남산을 돌아 장충동 오는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본다 제 몸 달아올라 온 산을 다 태워도 제 향기 놓치지 않는 저 꽃의 몸부림 내 작은 가슴에 불붙어 오는 그리움도 저 산에 뿌려져 제 모습 온전히 드러내는 한바탕 몸부림이었으면 꼿꼿이 서서 붉은 채로 죽어가는 봄꽃이었으면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문학의 전당) 4월이 다 지나간다. 4월은 춥고 스산했으며 끝내 강원도 어디쯤에 폭설을 퍼부었다. 비바람 속에서 오체투지로 버티던 꽃들도 철늦은 꽃샘바람에 새파랗게 질렸다. ‘꼿꼿이 서서 붉은 채로 죽어가는 봄꽃’들이 짧지만 화려했던 봄날의 한때를 그리워하면서 초록 속으로 급하게 몸을 숨긴다. 때로 저 봄꽃들처럼 살다 가고싶다. 온몸 불살라 타오르다가 소리없이 지워지고 싶다. 하얗.. 더보기
오광수의 오솔길 1 기계 기계 -공광규 허겁지겁 출근하는 나를 앞집 개가 짖지도 않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저 인간…… 망가져서 달그락거리는…… 감가상각이 끝나가는…… 겨우 굴러가는 기계 아냐?” 개는 이렇게 생각을 더듬거리고 있나 보다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는 이 밀림의 누구인가 생산성과 헐떡이며 성교를 벌이고 있는 나는. -공광규시집 ‘소주병’(실천문학) 불혹이 넘은 시인의 시집에서 지친 어깨가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고 깨끗한 연애를 꿈꾸다가도/끝내는 튼튼한 가정을 위해 건배’(흘러가는 실내 포장마차)하고, ‘신혼의 첫 다짐처럼 하얗던 벽지도/때가 탈대로 타고/방구석에 무관심이 거미줄을 친’(휴일, 권태) 집에서 산다. ‘나는 그게 안 되고/아내는 그것도 못하냐며 핀잔을 주고/나는 더 쪼그라들고/아내는 이내 돌아눕는다.’ .. 더보기
[TV는 추잉검]‘나는 가수다’가 ‘나름 가수다’에서 배워야할 것들 지난 주말 방송한 MBC 의 ‘나름 가수다’편은 같은 방송사의 ‘나는 가수다’를 패러디한 수작이었다. ‘나름 가수다’의 시청률은 20.6%(AGB닐슨미디어리서치)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나는 가수다’는 8·7%로 실망스런 시청률을 보였다. ‘짝퉁’이 ‘명품’을 가볍게 제압한 꼴이다. 왜 그랬을까. 우선 주말에 방송된 두 예능 프로그램의 콘텐츠를 살펴보자.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7명의 멤버가 서로의 노래를 바꿔 부르는 방식으로 진행된 ‘나름 가수다’는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정준하의 ‘키 큰 노총각 이야기’는 “마흔 둘 노총각, 제 이야기”로 시작해 “노총각 모두 힘내세요. 우리 꿈은 결혼 아닌 사랑, 죽을 때까지 사랑해요”라고 이어지는 가사가 시청자들을 울렸다. 그런가 .. 더보기
밀본, MB, 세종 SBS 사극 를 열심히 보고 있다. 원작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터여서 어떻게 드라마로 구현했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한글창제라는 역사적 사실에 추리와 액션을 가미한 이 드라마는 볼수록 매력이 있다. 회를 거듭하면서 ‘본방사수’를 하는 광팬이 됐다. 경향신문DB “지랄하고 자빠졌네”를 연발하는 세종 이도(한석규)와 한글창제를 막으려는 조직인 밀본의 본원(윤제문)과의 치열한 대립, 여기에 드라마의 재미를 이끌어가는 강채윤(장혁) 등 출연진들의 호연도 볼 만하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글자와 권력의 대립이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제 뜻을 펴지 못한다’면서 한글을 창제하려는 세종과, ‘글자가 반포되면 성리학과 관료체제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양반 관료들의 치열한 싸움이 기본 줄거리다. 극중에서.. 더보기
울림이 빠진 K팝 걸그룹 원더걸스의 신곡 뮤직비디오가 공개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수 150만건을 돌파했다. 남성 아이돌그룹 2PM의 일본 공연티켓 10만장이 예매 1분 만에 매진됐다. 그룹 빅뱅은 ‘2011 MTV 유럽뮤직어워드’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을 물리치고 월드 와이드 액트상을 수상했다. 연일 들려오는 한류스타들의 뉴스는 한결같이 놀라운 소식뿐이다. 그 인기가 바람 만난 산불처럼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번져가고 있다. 사진제공: SM엔터테인먼트 | 경향신문DB 10여년 전인 1999년 초 기자는 일본 도쿄에 출장을 갔었다. 당시 한국에서 인기가 높던 걸그룹 S.E.S의 일본 진출을 위한 쇼케이스 취재차 간 거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 알려진 한국가수는 조용필을 비롯해 현지에서 활동하던 김연자와 계은숙 정도. SM.. 더보기
조용필과 가을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에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 조용필 ‘바람의 노래’ 일부 가을은 조용필과 함께 깊어간다. 조용필의 노래는 유독 가을을 닮았다. 그의 노래에서는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나고, 단풍나무 숲 사이 작은 오솔길도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가을산 메아리를 닮았고, 노랫말에서는 시인의 정서가 듬뿍 묻어난다. 격정적이고, 달콤하며, 사색적이다. 나는 가.. 더보기
어떤 결정 추석 차례상에 으레 ‘조율시이(棗栗枾梨)’가 오르듯 ‘추석민심’ 또한 오래된 차림상이다. 특히 총선이나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추석민심의 향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 사람만 모이면 정치얘기부터 꺼내는 게 이 나라 백성들이어서 추석에 형성된 여론이 표의 향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추석 상차림은 남달랐다. 마치 대추나 밤, 감, 배 옆에 멜론이나 바나나가 올라온 느낌이랄까.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올라와 있어야 할 자리에 안철수와 강호동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추석 연휴 기간 내내 어딜 가든 온통 두 사람 얘기뿐이었다.  알다시피 안철수는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철회하고 박원순 변호사와 후보 단일화를 이뤘다. 이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래된 ‘밑반찬’인 박근혜의 지지율을 능가하면서 유력 대선.. 더보기
‘58년 개띠’와 드라마 나이 오십줄의 친구가 술자리를 마다하고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드라마를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출생비밀, 재벌과 신데렐라, 음모와 복수가 판치는 ‘막장드라마’라니…. 왕년에 그는 술자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나오던 친구였다. 그랬던 친구가 고백했다. 요즘 드라마 보면서 하도 울어서 ‘마누라’로부터 타박을 받는다고. 틀면 나온다고 해서 ‘수도꼭지’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 자리에 있던 또다른 50대 여성이 “내 남편도 드라마 중독”이라면서 “요일별로 어떤 드라마를 하는지 줄줄이 꿰고 있다”고 했다. MBC 일일시트콤 의 중년사내 김집사(정호빈)는 극중에서 드라마 ‘광팬’이다. 그는 드라마 속의 세계가 마치 현실세계인양 일희일비한다. 최근 시청률 조사회사 AGB닐슨미디어리서치는 중장년 남성들의.. 더보기
서바이벌 오디션, 나는 대통령이다 오랜 논쟁 끝에 2012년 1월 방송 3사가 공동기획하고, 종합일간지들이 후원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나는 대통령이다’가 시작됐다. 1월 방송을 시작해서 12월에 끝나는 연간 기획 프로그램. 시작은 단순했다. ‘가수, 아나운서, 탤런트도 오디션으로 뽑는데 대통령도 안될 게 없지 않으냐. 지난 시대 대통령선거로 인한 각종 병폐를 청산하고, 디지털 미디어시대에 걸맞은 대통령을 뽑아보자’는 취지였다. 여야 할 것 없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이 같은 선거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대통령선거가 애들 장난이냐, 나라를 망치려고 작정을 했느냐, 임재범이나 이효리가 당선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등등. 그러나 국민들은 현명했다. 그릇된 판단으로 이상한 대통령을 뽑고 후회했던 국민들이 가장 민주적이고, 오류가 적은 방.. 더보기
‘속도전’에 희생당한 삶 새해는 휴대폰 알림음과 함께 왔다. 지인들이 보낸 메시지들이 주루룩 뜬다. 한 해 고마웠다, 복 많이 받으시라, 내년에는 자주 만나자. 대개 그런 내용이다. 보신각 종이 울리는 순간 ‘카카오톡’에서는 집단 채팅이 시작된다. ‘페이스북’에도 이런저런 메시지들이 올라왔다. 뉴욕에 있는 친구는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고, 오클랜드에 있는 지인은 스카이 타워의 화려한 불꽃놀이 동영상을 올린 뒤 안부를 물었다. 대신 내 책상 위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이 거의 사라졌다. 얼리어답터도 못되는 중년 사내의 연말연시가 이랬으니 이 나라 많은 이들의 새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불과 1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새해 신새벽 아들 녀석과 함께 해돋이를 보러 뒷산에 올랐다. 오르기 전 휴대폰.. 더보기
다시 ‘우상의 시대’에 서서 ‘하나, 하나! 왼발, 왼발! 오와 열, 오와 열!…중략…그는 반평생을 연병장 아니면 운동장에서 보낸 사나이답게 군중을 휘어잡는 재간을 터득하여 비상금처럼 휴대하고 다녔다.’ 70년대 발표된 소설가 윤흥길의 단편 ‘제식훈련변천약사(諸式訓練變遷略史)’는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1급 정교사 강습을 받게 된 중·고교 체육교사들의 제식훈련을 소재로 당대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수작이다. 우연히 이 작품을 다시 읽다가 고교 시절 제식훈련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에 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오와 열’이 생명인 제식훈련은 물론 총검술 16개 동작, M1소총 분해와 조립 등 일찌감치 ‘군대맛’을 봐야 했다. 그 시절.. 더보기
K형, 곧 겨울입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 폐사지처럼 산다 /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 (중략) /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 폐사지처럼 산다’(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일부) K형. 시인 정호승의 신작 시집 을 읽다가 시편마다 뚝뚝 묻어나는 비애와 상처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정말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기도 힘든 요즘입니다. 특히 이 나라 중장년들의 삶이란 게 대략 난감하기.. 더보기
왠지, 이 가을이 쓸쓸하다 풍경 하나. 올봄에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가봐야겠다고 맘먹었지만 늘 쫓기듯 제주도를 다녀왔기에 작지만 아름다운 섬, 마라도를 보는 건 쉽지 않았다. ‘마라도는 내 제주도 생활에서 한라산 꼭대기의 그 구름 속에 가득한 전망과 함께 내게 태고 이래의 초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기이한 용기를 베풀어 주었다.’ (고은 중에서). 마라도의 장군바위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찍이 시인 고은은 제주도에 머물던 낭인 시절부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마라도를 가끔 찾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풍성한 자연의 숨결을 빚어 훗날 노벨상 후보에 오른 저력의 터전을 마련했음은 불문가지다. 그런 고은의 증언을 떠올리면서 나 역시 부푼 기대를 갖고 모슬포항을 떠나 마라도의 선착장에 내렸다. 나.. 더보기
‘명품녀’와 ‘명품방송’ 사이 소위 ‘4억원 명품녀’로 마음이 상한 국민들이 많다. ‘4억원 명품녀’로 지칭된 김경아씨는 지난 7일 Mnet 에 출연, “자신이 현재 입고 있는 옷과 장신구 등이 4억원어치에 이르며 직업이 없지만 부모님의 용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유지한다”면서 “내가 패리스 힐튼보다 못할 게 없다”고 큰소리쳤다.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네티즌들의 비난여론이 들끓자 급기야는 국회까지 나섰다. 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 출석한 국세청장에게 “서민에게 상실감과 박탈감을 주는 ‘명품녀’에 대해 과세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방송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M.net / 경향신문 자료 사진 (M.net 제공)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이 사건을 접하면서 한숨이 .. 더보기
편히 쉬세요, 앙선생 앙드레 김, 아니 김봉남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그 분이 세상을 떴다. 원로배우 최은희부터 최지우, 탤런트 최불암부터 원빈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초월한 스타들의 조문행렬은 그의 그림자가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왕년의 톱스타였던 엄앵란을 시작으로 손녀뻘인 고아라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스타들이 그가 바느질한 옷을 입은 셈이니 그 영향력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앙선생’은 그의 표현처럼 ‘판타스틱’하고 ‘엘레강스’한 생애를 살다 가셨다. 많은 이들이 그 분을 추모하는 건 자신의 꿈을 위해 일평생을 매진해온 열정에 대한 헌사이리라. 패션에 문외한이지만 그 분의 독특한 디자인은 온 국민이 알 정도로 개성이 강하고 특별했다. 끊임없는 열정으로 평생을 지켜온 원칙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 앙.. 더보기
‘병역기피 의혹’ 안상수와 유승준 정치인과 연예인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우선 두 직업군은 모두 인기를 먹고 산다. 아무리 훌륭한 자원이라도 대중들의 지지가 없으면 인기를 얻기 힘들다. 가수라면 음반이 팔리지 않고, 영화배우라면 관객을 모으기 어렵다. 정치인들도 선거에서 표를 얻지 못하면 정치생명을 이어갈 수가 없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신문이나 방송에 이름이 나와야 유명세를 탈 수 있다. 다만 정치면이나 문화면 등에 오르내려야지 사회면의 톱뉴스가 되면 곤란하다. 두 직업군은 이 때문에 평소 이미지 메이킹에 힘써야 한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르고 연기를 잘해도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하면 무명의 세월을 견뎌야 하고, 정치인 역시 네거티브 이미지가 불거지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더보기
유쾌한 대세씨 ㆍ멋진 골 넣고 환호하는 모습 ㆍ스물일곱살 ‘인민 루니’의 눈물 한 재일교포 청년이 꿈의 월드컵 무대서 줄줄 눈물을 쏟았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간절히 원했던 꿈의 월드컵 무대에서 최강팀 브라질과 경기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고 눈물의 이유를 밝혔다. 북한 월드컵 팀의 스트라이커 정대세. 월드컵에 앞서 그는 틈틈이 익힌 포르투갈어로 “북한의 호랑이와 포르투갈의 사자가 맞붙는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번 월드컵의 이슈메이커가 될 기미가 보였다. 그의 어머니 리정금씨와 아버지 정길부씨는 ‘세계를 향해 크게 날개를 펼치라’면서 ‘대세(大世)’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나는 요즘 이 청년의 일거수 일투족이 즐겁다. 올해 스물일곱살의 청년 정대세를 처.. 더보기
오월의 날들이 간다 아름다운 오월이 간다. 아니 가슴 서늘한 오월, 괜스레 피가 뜨거워지는 오월이 간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프랑스 샹송가수 미쉘 뽈라레프가 부른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Qui A Tue Grand Maman)’를 듣는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진 감미로운 목소리가 온 몸을 감싼다. 음표들이 오월의 아카시아향처럼 피어나고, 기억의 세포들이 일제히 기립한다.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에/ 정원엔 꽃들이 만발했지/ 이제 그 시절은 가고 남은 거라고는 기억 뿐/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세월인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인가?’ 80년대 중반의 오월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 노래는 몰라도 선율은 뚜렷이 기억할 것이다. 당시 이 노래는 누군가에 의해 ‘오월의 노래’로 번안되어 불렸다.. 더보기
‘하 수상한’ 4월 4월의 꽃들이 속절없이 진다. 채 피지도 못하고 지는 봄꽃들이 안쓰럽다. 궂은 날씨 때문에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채 비바람에 스러져간 저 꽃들, 마치 서해 앞바다에서 황망히 생을 마감한 청춘들을 닮았다. 무릇 꽃은 4월의 햇살 속에서 환하게 피어나, 봄꽃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꽃다울 터인데…. 올 봄 피어난 꽃들은 시절을 잘못 만난 탓에 꽃다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봄날의 인간사 또한 그러해서 저 남쪽 끝에서부터 발화해야 할 봄꽃축제가 하나둘 취소되더니 북쪽 끝까지 매양 비슷한 풍경이다. 4월의 시인 신동엽은 이렇게 노래했다.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이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하다커니 // 눈이 휘둥그레진 수소문에 의하면 / 봄은 먼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 동백꽃 산모.. 더보기
‘배삼룡’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 “신문을 봤더니 10년 동안 물가는 36%밖에 안 올랐는데 등록금은 116%나 올랐대. 아니 등록금이 우리 아빠 혈압이야. 옛날엔 우리 아버지들이 소 팔아서 등록금 댔지만 지금은 소 팔아서 택도 없어. 왜 아버지들이 등록금 대려고 죽을 때까지 소처럼 일해야 되냐고. 우리 아빠가 무슨 ‘워낭소리’야. 이거 슬프잖아.” KBS 의 ‘동혁이 형’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들이 ‘뻥’ 터진다. 이른바 ‘일침개그’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맨 장동혁씨는 대학 등록금, 휴대전화 요금 등의 불합리를 거침없이 꼬집는다. 재미도 있고, 속도 후련하다. 신예 개그맨이 브라운관에서 빛나고 있을 때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씨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 초 MBC 는 보다 훨씬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박치기왕’ 김일의 .. 더보기
울지 마, 아이티의 소녀여 늦은 저녁 국밥집에서 TV뉴스를 보다가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따끈한 국밥 앞에서 도저히 숟가락을 뜰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아이티 대지진의 현장에서 리포터가 한 소녀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구출된 11살난 소녀가 “엄마, 죽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숨을 거뒀다는…. ‘살찐 소파’처럼 부푼 내 몸이, 기아문제에 무관심했던 내 이기심이 한꺼번에 부끄러워졌다. 그랬다. 대지진 전까지 나에게 아이티는 상반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카리브해의 뜨거운 열정을 담은 그네들의 리듬, 강렬한 삼원색의 색채가 인상적인 아이티 무명 화가의 그림들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반면 원색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도 또렷하다. 몇 년 전 읽은 일본의 소설가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책 .. 더보기
2009년, 꼭 기억해야할 것들 ㆍ평범하게 살기 어려웠던 세월 ㆍ용산의 아버지·바보 노무현··· 한 해가 저문다. 모든 이들이 가슴 속에 추억의 등불을 켜고, 차분히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열정으로, 또 누군가는 소멸로 한 해를 정리할 것이다. 서러울 것도 그리 흥분할 것도 없는 저녁, 조용히 루시드 폴의 새 앨범을 듣는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중략…)/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중에서 가수 루시드 폴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