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기계독이 오른 까까머리 중학생, 여드름 투성이의 고등학생들은 저마다 2편 동시상영관으로 몰려갔다. 당시만 해도 소위 개봉관에 학생들이 출입하는 건 자유롭지 못했기에 동시상영관이나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극장은 학생들의 명소였다. 더군다나 이소룡의 영화는 미성년자입장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150원만 내면 매일 체육선생에게 얻어터지고, 지긋지긋한 수학공식을 외워야 했던 현실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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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청춘들은 이소룡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 익혔다는 태극권과 영춘권, 공력권을 익히기 위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쿵푸도장으로 몰려갔다. 동네 패싸움에 쌍절곤이 등장하여 피가 튀는 혈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가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 색깔에 검은 줄무늬가 쳐진 트레이닝복은 선망의 대상이 됐지만 그걸 사입을 만한 형편이 되는 청춘들도 많지 않았다.
당대의 문화아이콘 이소룡이 맹활약 하던 시기는 한국 정치사의 암흑기였다. 1972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해 10월유신을 선포했다. 박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소위 통일주최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로 만들면서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까지 가졌다. 불황의 시대였지만 당대의 성인들은 영화 <대부>나 <007 시리즈>를 보면서 독재의 아픔을 삭였고, 청소년이나 젊은층들은 이소룡의 영화에 빠져서 고단한 세월들을 잊었다. 당시 각 가정에는 금성사(현 LG)에서 생산한 흑백TV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70㎜ 와이드 화면에서 총천연색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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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를 살았던 이 땅의 중년들은 지금도 이소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회고한다.
"미성년자 입장불가였던 이소룡의 영화를 보기 위해 아빠의 모자와 바바리코트는 필수였다"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감독 유하는 그의 책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투른 쌍절곤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줬다.'
굵고 짧은 인생을 살다간 부르스 리. 미국 워싱턴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무도인이자 영화배우로 살다간 이소룡에게 70년대 청춘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그의 진정성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런 진정성에 열광했던 세대였던 베이비 부머들은 산업사회 역군으로서 그 몫을 다하고 서서히 은퇴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소룡이 남긴 말 역시 이 시대에 유효하다. 부르스 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까.
"당신이 어떤 삶을 산다해도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인생의 어떤 달콤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이소룡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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