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대중음악계의 돈키호테, 이두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대중음악계의 돈키호테, 이두헌

 

 

 

 80년대 중반 당시 잘나가던 지구레코드에서 내가 근무하던 잡지사로 보내온 LP음반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풋풋한 젊은이들로 결성된 다섯손가락이라는 그룹의 데뷔앨범이었다. 집에 가져가서 무심결에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음악을 듣다가 나는 허리를 곧추 세웠다. 아 이게 뭐지?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과 ‘새벽기차’ 등 범상치 않은 제목을 단 노래들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록을 기반으로 포크를 가미한 노래들은 리듬과 멜로디가 풍성했으며, 노랫말은 너무도 서정적이고 감미로웠다. 가사 한 편을 옮겨 적어놓으면 한 편의 잘 쓰여진 시였다. 그 시절은 캠퍼스 밴드의 열풍이 불어올 때였다. 전인권이 이끄는 들국화와 김창완이 동생들과 만든 산울림의 영향력이 막강했으며, 항공대의 런웨이와 홍익대의 블랙테트라의 멤버들이 힘을 합친 송골매가 음악시장을 뒤흔들었다. 또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과 신대철의 시나위가 시장에 얼굴을 내밀고 활동할 때였다. 전두환의 집권으로 군부독재가 시작되던 시절에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록음악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하튼 그 이름과 나란히 반열에 올려놓아도 모자람이 없는 다섯손가락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1집의 멤버는 임형순, 이두헌, 박강영, 최태완, 이우빈. 모두 대학 신입생들이었고 수록곡을 작사·작곡한 이가 리더인 이두헌이었다. 나보다 연배가 아래인 이두헌과 만나자마자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넘어 교유를 시작했다. 그의 연애에도 관여했고, 책을 내고 음반을 내는 일에도 한 다리 걸쳤다. 두 사람 모두 술을 좋아해서 새벽기차가 떠날 시간까지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그리고 술이 취하면 그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비오는 수요일엔 물론 잊지 않고 그의 노래를 불렀다.  
 벌써 30년이 다 돼간다. 그사이 이두헌은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서 버클리음대를 거쳐 서던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기타로 석사를 받았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자식도 가졌다.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기타로 석사학위를 받은 이가 또 있을까?
 수많은 여름과 가을이 지나면서 서로가 한 번도 상대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가 좋다. 아니 그의 음악적 태도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좋다. 치열한 경쟁은 기본이고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유명세를 얻을 수 있는 대중음악계에서 그가 아직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우선 이두헌의 음악적 지향점을 살펴보자. 다섯손가락의 2집 앨범의 수록곡인 ‘전자오락실에서’나 ‘이층에서 본 거리’ 등을 비롯해서 그의 솔로앨범 수록곡들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나지막히 속삭인다. 2000년대 초반 내놓은 솔로앨범 <이미지>나 2011년 내놓은 <싱스>등의 수록곡은 10년 터울로 발표했지만 마치 연작같은 느낌을 준다. 훨씬 간결하면서도 임펙트가 느껴지는 그의 기타연주와 결코 잘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분명한 색깔이 느껴지는 중독성이 있는 노래들. 또 그가 쓴 노랫말들은 그 나이만큼 깊어지고 넓어져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편에 서서 그의 변화되는 음악을 지켜봤지만 세상은 그의 작업을 쉽게 외면했다. 아이돌이 주름잡는 음악시장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는 메아리조차 주지 못했다. 유명 아이돌그룹이 그의 노래 ‘풍선’을 리메이크하는 바람에 원곡자로 알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은 무섭게 변했지만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한동안 방배동에 라이브뮤직 와인바 ‘피노’를 열어놓고 그곳에서 노래도 하고 연주도 했다. 그리 비싸지도 않은 와인바지만 일년 365일 록과 재즈, 포크와 블루스 등 온갖 장르에서 활약하는 밴드들의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음악과 와인이 있는 공간에 중독된 마니아들에게 소문이 난 명소로 자리잡았다.      
 그는 늘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느리게, 샛길이 아닌 신작로로 걷는 것이 그의 책무이자 소신이었다. 창작뮤지컬의 음악을 맡아서 무대에 올리기도 하고, 와인을 소재로 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한때 음반제작사 사장으로 나섰을때 내심 걱정했다. 음악에 대한 소신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당시 이승환이 그의 제작사 대표가수였고, 신승훈의 일본 진출을 돕는 등 나름대로 음악비지니스를 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고통’ 때문에 이내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 삶의 지향점과 음악적 니즈가 맞아 떨어진 ‘딱 그 일’을 시작했다. 이른바 마음음악회. 수년전 경기도 용인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목공소 주인과 가까워졌다. 나무로 온갖 가구를 만드는 장인과 기타 하나로 노래를 만드는 가수가 죽이 맞은 것이다. 마음음악회는 동네 주민들을 목공소로 초대하여 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작됐다. 한 번 무대에 서면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천만원을 벌 수 있는 가수가 무료공연이라니. 게다가 관객은 십수명이 고작인데 그는 목공소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돌면서 노래를 했다. 처음 혼자 하던 공연이 마음맞는 후배들을 불러모아 이두헌밴드를 결성, 밴드공연으로 규모가 커졌다. 제주도 올레길에 있는 팬션, 하동 쌍계사의 차밭, 천리포 수목원, 태안의 소무 팬션에 이르기까지. 마음음악회는 전국을 돌면서 100여회가 넘는 공연을 열었다. 그때마다 밴드 후배들의 수고료는 그의 주머니에서 나갔다.
  인간관계에서 단 한 번도 주판알을 튀겨본 일이 없는 그를 보면서 늘 경이로웠다. 다행히 그는 공연을 곁들인 강연을 통해서 대부분의 수입을 벌어들인다. 이미 대학의 한 학기 강좌로 자리잡은 비틀즈 강좌를 비롯해서 그가 개발한 강좌는 음악과 경제, 음악과 인문학, 음악과 철학 등과 조우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 번이라도 그의 강의를 들어본 이라면 금새 중독되고 만다. 이때문에 대기업 CEO나 육군장성의 수련회 등에서 그의 강좌는 특급 인기를 누리는 강좌다. 밴드음악으로 비틀즈의 명곡들을 직접 감상하면서 비틀즈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알아가고, 이를 경영현장에 접목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는 강의가 결코 지루할 수 없다. 지난 학기 대학에서 비틀즈 강의를 했던 그는 이번 학기에 흑인음악을 주제로 강좌를 연다고 한다.
 이처럼 늘 ‘퍼주는 삶’과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이두헌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그는 최근 경기도 용인 동백에 ‘책가옥’이라는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지인들과의 놀이터지만 단순한 놀이터 이상의 공간이다. 그의 회사인 디키뮤직의 사무실이기도 한 이곳은 60평 남짓한 공간에 노래와 술, 책과 커피, 기타와 와인으로 채워졌다. 
 이 공간의 한 가운데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잡고 있으며 여기저기 그가 아끼는 기타와 책들이 있어야할 그 자리에 놓여있다. 또 한가운데 수백년된 호두나무로 만든 대형 다용도 탁자가 놓여있다. 주인이 직접 내려주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너무나 훌륭한 소리를 내는 각종 음향기기가 내뿜는 명곡들을 감상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 달에 한두번씩 이곳에서 펼쳐지는 시골음악회가 가장 기다려지는 행사다. 이두헌밴드가 그때마다 주제를 달리하여 펼치는 공연에서 비틀즈, 신중현, 앨비스 프레슬리의 음악들이 마구 달린다. 돈 있는 사람들의 호사취미가 아니다. 그냥 몇만원의 참가비를 내고 준비된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서 음악에 몸을 맡기면 된다. 어떤 때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분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온 음식을 펼쳐놓기도 한다. 비좁은 공간 때문에 관객이래야 30~40명 안팎. 예전에 대학로 소극장에서 전인권이나 김광석의 공연을 보던 시절의 향수가 샘솟는 무대다. 게다가 클래식 유망주들도 이 작은 공간에서 연주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에 이처럼 행복한 공간이 또 있을까? 이두헌이라는 사내. 때로는 바보 온달 같고, 돈키호테 같은 사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가 최근에 새로 만들어서 보내온 음악을 들으면서 ‘책가옥’ 같은 공간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났으면 좀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 갈수록 멋있게 나이들어가는 이두헌이가 아는 동생이어서 참 행복하다. 그는 평생 남한테 퍼줄 줄 모르고 살아온 나의 각성제이기도 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나는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만큼만, 그가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만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