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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노래, 때로 시보다 아름다운

 

 

 

 

              사진 경향신문 포토뱅크

 

노래, 때로 시보다 아름다운
 -대중가요 노랫말의 시적 감수성 분석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Before it’s washed to the sea?
Yes, ‘n’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Yes, ’n‘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and pretend that he just doesn’t see?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1
 시인 딜런 토마스를 너무도 좋아해서 예명까지 밥 딜런으로 붙인 전설적인 팝가수가 부른 ‘바람만이 알고 있네’(Blowin‘ in the Wind)의 노랫말 일부다. 팝가사를 번역한다는 것은 때로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얘기는 대강 이렇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그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가야만/비둘기는 모래땅에서 쉴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다녀야/그것들이 영영 금지될 수 있을까/그 대답은 친구여, 바람만이 알고 있네/바람만이 알고 있다네//얼마나 많은 세월이 가고 나서야/산이 씻겨 내려서 바다로 갈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사람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사람이 얼마나 더 외면을 하고/보지 못한 척 할 수 있을까/그 대답은 친구여, 바람만이 알고 있네/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전쟁에 대한 회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은 이 노래는 1960년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수많은 젊은이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시적인 상상력과 철학적인 사유로 아직까지 밥 딜런은 당대 최고의 음유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생명력 또한 길어서 지금까지도 그의 노래들은 스테디송 반열에 올라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중음악의 시적 감수성을 논하는 자리의 맨 앞에 밥 딜런을 인용한 것은 그의 노래들이 이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징성을 드러내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일정 부분 팝송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백판(정품이 아닌 비품)을 사서 턴테이블에 걸고 음악적 매력에 푹 빠져보기도 하고, 그 노래를 연주하고 부르기 위해 열심히 통기타를 배웠으리라. 라디오FM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따라 부르기 위해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비틀즈’를 시작으로 레드 제플린, 사이먼&가펑클 등 수많은 팝스타들이 세계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왔다. 그들 뿐인가. 그룹 ‘비지스’를 비롯해 로드 스튜어트, 제니스 조플린, 존 바에즈, 그룹 ‘퀸’, 레오나드 코엔, 닐 다이아몬드, 그룹 ‘아바’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노랫말과 감성적인 멜로디로 세계인들의 감성을 지배해온 팝스타들은 얼마든지 있다. 
 일일이 그 이름을 거명하기 조차 힘들다. 록이든 블루스든 재즈든 그 장르와는 상관없이 시적 감수성이 넘치는 팝음악을 구사하던 음유시인들이 한 시대의 정서를 지배해왔다. 현대시인들의 계보를 줄줄이 꿰는 이는 드물어도 음유시인들의 계보와 그들의 대표작들을 줄줄이 꿰는 이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만큼 대중음악은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흡인력이 높고, 그 흡인력만큼이나 당대의 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해온 셈이다.
 이 글에서 이미 수많은 대중음악평론가들에 의해 입증된 전설적인 팝스타들의 노랫말들을  다시한번 반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그들에 대한 분석적인 글들은 차고 넘칠 뿐 아니라 일부는 이미 화석이 돼 버렸다.
 대신 역사가 일천한 한국 대중음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시적 감수성이 어떻게 시작되어 확산돼 왔는지 분석하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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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얼마 전 가수 정태춘이 시집 ‘노독일처(老獨一處)’(실천문학사)를 세상에 내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인으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아, 시를 써야겠다/황지우처럼 시를 써야겠다/‘저물면서 빛나’지 않고/그저 무너지는 바다/잿빛 바다/그의 전생과 엇비슷한 전생쯤에서/그가 아닌 내가 보았던/벼랑의 바다,단애의 바다‘ -시 ’황지우처럼‘ 일부
 ‘북한강에서’‘떠나가는 배’등 서정적인 노랫말로 한 시대를 풍미해온 그가 왜 시인의 길을 택했을까. 또 그 첫시집에서 대한민국 현역 대표시인 중의 한 사람인 황지우를 소재로 삼았을까.
 그의 시집에서 해답을 찾을만한 어떠한 단서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유추해보자면 그는 ‘시적인 가사’가 아닌 ‘진짜 시’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이땅의 대중가요는 늘 지식인 계층들로부터 폄훼 당해온 것이 사실이다. ‘뽕짝’이나 ‘유행가’로 불리면서 그저 흔한 사랑이나 이별을 얘기하는 하위문화로 인식돼 왔다.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래나 우리 노랫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논의돼 본적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시가 혹은 시인이 신문이나 각종 문예지의 중심에서 얘기될 때도 정태춘의 아름다운 노랫말은 제대로 평가된 적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노랫말보다는 훨씬 형식이 자유로운 시를 쓰고 싶어하는 정태춘의 의지가 있었겠지만 저간에는 그러한 불만(?)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갈 길은 머나먼데/고요히 잡아주는 손 있어/서러움을 더해주나/ 저 사공이 나를 태우고/노 저어 떠나면/또다른 날 위에 내리면/나는 어디로 가야하나/서해 먼 바다 위론 눈물이/비단결처럼 고운데/나 떠나 가는 배에 물결은 멀리멀리 퍼져간다/꿈을 꾸는 저녁 바다에/갈매기 날아가고/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물결 따라 멀어져간다’
 그의 절창인 ‘서해에서’의 노랫말이 보여주듯 정태춘은 탁월한 시적 감성을 보여준다. 시인 안도현이 이 노래를 18번으로 삼은 이유도 게 있지 않을까. 이 노래뿐 아니라 그의 대부분의 노래들은 탁월한 서정시인으로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 보여준다. 여기에 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한 복판에 뛰어들면서 보여준 그의 전투적 서정 역시 시대와 맞서 싸운 용감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도 갖고 있다. 저 어두웠던 시대에 많은 지식인들이 침묵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의 투쟁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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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대중음악 속에 표현된 노랫말들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대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정신을 담았다는 점이다. 시인 김지하와 가수 김민기는 그 중심에 서서 시대와의 불화를 얘기했다. 그 작업은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뿐 아니라 서슬퍼런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의 대상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시와 노래로 독재의 칼날과 맞서 싸웠다.
 ‘얼어붙은 저 하늘/얼어붙은 저 벌판/태양도 빛을 잃어/아 캄캄한 가난의 거리/어디에서 왔나/얼굴 여윈 사람들/무얼 찾아 헤매이나/저 눈 저 메마른 손길/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김지하가 ‘오적‘을 발표한 뒤 차가운 감옥에 있을때 김민기는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여 ’금관의 예수‘를 빌표했다. 그의 또다른 걸작인 ’공장의 불빛‘은 노동의 고단함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청춘을 보내야했던 우리 누이들에 대한 헌사였다.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한가운데 내몰려 끝없이 탄압받던 산업일꾼들의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했던 작품이었다.
 그의 대표곡인 ’친구’나 ‘작은 연못‘등 김민기가 만들었던 대표작들을 섭렵하고 나면 한 시대의 저항문학의 표상이었던 김지하의 그것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평가받아 마땅한 파괴력을 느낄 수 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 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태운다/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한 낮에 찌는 나의 시련일지라’
 양희은이 불러 대중화된 이 노래는 적어도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최루탄이 난무하는 대학가의 스테디송이었다. 지금은 공연기획자로서 활동하는 김민기는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맞서 싸운 1세대 작가이자 가수로 기록될 만하다.
 김민기가 노래운동의 포문을 열었다면 안치환은 노래가 대중들의 의식을 전환시키고 깨우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보인 2세대 작가였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어머님의 눈물이/가슴 속에 사무쳐오는/갈라진 이 세상에/민중의 넋이 주인되는/참세상 자유 위하여/시퍼렇게 쑥물 들어도/강물 저어 가리라/솔아솔아 푸르른 솔아/샛바람에 떨지 마라/창살 아래 내가 묶인 곳/살아서 만나리라’
 안치환이 쓰고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80년대 대학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동가요로 사랑받은 노래다. 운동권 노래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주요멤버였던 그는 솔로 데뷔 이후에도 운동권 색채가 짙은 노래들을 발표했다. 시대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그의 노래도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전투적 서정의 냄새를 조금씩 지워나가면서도 그 정신은 늘 한 줄기를 유지한다. 그의 또다른 히트곡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갖춘 노래들을 줄곧 불러온 몇 안되는 가수 중의 한사람이다.
 ’강물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음 알게 되지/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부둥켜 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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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음유시인을 얘기하면서 이사람을 빼놓을 수는 없다. ‘왜 불러’로 시작하여 ‘딩동댕 지난여름‘’가나다라‘’담배가게 아가씨‘등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했던 송창식이 그 주인공이다. 그가 한때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기수였기도 하지만 당대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로맨티스트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자 떠나자 동해바다로/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누구든 청춘의 한 고비에서 ‘고래사냥’을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절을 살던 청년들에게 이 노래는 터질듯한 가슴속의 울분을 달래주기에 더없이 좋은 노래였다.
 이러한 은유적 로맨티스트들은 송창식 이후에도 시대상황에 따라 변주를 계속하면서 명맥을 이어간다. ‘들국화’의 멤버이기도 했던 최성원이 부른 ‘제주도의 푸른 밤’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노래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제주도 푸른 밤 그별 아래/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신문에 티비에 월급봉투에/그동안 둘이서 힘들게 별로 없어요/제주도 푸른 밤 그별 아래/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아파트 담벼락 보다는/바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밤 하늘 아래로’
 최근 가수 성시경이 리메이크하여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이 노래는 풍부한 시적 감성이 잘 살아있다. 시대가 변해도 노래가 주는 감성이 잘 묻어나있는 노랫말 때문에 리메이크라는 음악적 변주를 통해서도 다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한 맥락에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이영훈이 작사하고 이문세가 부른 이 노래 역시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은 노래다. 그 풍경에서 머무르지 않고 마치 삶의 내밀한 비밀까지 품고 있는 듯한 노랫말이 일품이다. 이문세가 오늘날까지 그 인기를 누려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탁월한 시적 감성이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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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우리시대의 음유시인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몇 명 더 있다. 그중의 한 사람은 마치 담백하면서도 깔끔한 시를 쓰는 자연주의 시인을 연상케 하는 조동진이다.그의 노래는 조용하면서도 소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면서 한 시대를 풍미해왔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여름은 벌써 가버렸네/거리엔 어느새 싸늘한 바람/계절은 이렇게 쉽사리 가는데/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언젠가 개인시집을 내기도 했던 조동진은 그이 대표곡 ‘나뭇잎 사이로’에서 보듯이 시적인 감성을 통기타에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포크음악의 전령사였다. 
 ‘제비꽃’이나 ‘행복한 사람’등은 물론이고 시인 고은이 가사를 써준 ‘작은 배’에 이르기까지 그는 탁월한 서정시인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음유시인은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였다. 이미 전설이 된 노래 ‘가시나무’는   그가 얼마나 탁월한 감성의 소유자였는지 잘 드러내 보여준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의 쉴 곳 없네/내속엔 헛된 바램들로/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어린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의 쉴 곳 없네‘
 그가 부르기도 했고 양희은이 불러 더 유명해진 ‘한계령’ 역시 노랫말이 갖고 있는 시적인 탁월함이 돋보이는 노래다. 한 시대의 감성을 개인화시켜 내면의 풍경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성공한 하덕규의 작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들 외에도 197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산울림’도 시적 감수성이 돋보인다. 김창완이 이끄는 이들 삼형제 그룹은 유니크한 노랫말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때로 동요를 연상케하는 천진난만한 노랫말이 이들의 무기였다. ‘아니 벌써’‘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산할아버지’등등 그들의 히트곡들은 노래의 엄숙주의나 통속성을 뒤엎는 ‘유쾌한 반란’으로 기억할만하다. 
 이들 외에도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벽두엔 걸출한 가객들이 많았다. 전인권이 이끄는 ‘들국화’가 있었고, 작고한 김현식이 보컬로 활동했던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었다. 이들은 시적인 상상력과 탁월한 가창력을 무기로 한 시대를 풍미하기에 부족함이 잆던 음유시인이자 가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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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를 본일이 있는가?/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힌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한줄기 연기처럼 가루 없이 사라져도/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말아/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조용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사한 방송작가 양인자다. 적어도 작가 양인자는 그의 부군인 김희갑(작곡가)과 함께 천의무봉의 목소리를 가진 조용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양씨는 이 노래 외에도 ‘허공’‘바람이 전하는 말’‘그 겨울의 찻집’등 조용필의 히트곡들에 노랫말을 붙이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시적 감수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조용필 노래를 관통하는 절절ㄹ한 서사와 맞물려 있는 이가 심수봉이다. 지금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심수봉이지만 그녀의 아픈 과거는 늘 그녀의 노래와 더불어 얘기되면서 한 시대의 후일담을 만들어왔다. 그 대표적인 노래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아닐까.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눈 앞의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뱃고동소리도 울리지 마세요/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눈물 지으며 힘없이 돌아오네/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 아아/이별의 누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
 흔히 전통적인 남녀관계에 바탕을 둔 이 노래의 가사는 심수봉의 다소 청승맞는 목소리와 어우러져 젓가락 장단으로 부르는 마지막 노래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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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다보니 이 땅의 대중가요에 나타난 시적 감수성을 체계적으로 논하지 못하고 살짝 훑어보는 글이 되고 말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아직까지 어떤 지면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가진 글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만큼 시와 노랫말은 별개의 장르로 인식돼 왔으며 이로인해 서로 융화되어 분석해보는 시도조차 없었던 셈이다. 좀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와 최근의 가요들도 분석해보고 싶었지만 적어도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1990년대 이후의 노래들은 전세대의 그것과 발성법이 너무도 달랐다. 물론 그들의 노래 속에도 시적 감성이 배어 있지만 전세대의 그것과 뭉뚱그려 논하기엔 너무도 뚜렷한 경계선이 보였다.
 대신 지난봄 시전문 문예계간지 ‘시인세계’에서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애창곡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글을 끝낼까 한다. 왜냐하면 시와 가요가 어디쯤에서 만나는지 시인과 가수는 어느 감성대에서 만나 통했는지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조사라고 생각돼서다.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은 순위였다. 1위 ?봄날은 간다?(백설희), 2위 ?킬리만자로의 표범?(조용필), 3위 ?북한강에서?(정태춘), 4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양희은), 5위 ?한계령?(하덕규), 6위 ?아침이슬?(양희은), 7위 ?가시나무?(시인과 촌장)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임희숙), 9위 ?그 겨울의 찻집?(조용필) ?황성옛터?(황금심).
 고개를 끄덕이는 조사결과일 수도 있고,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있을 수 있겠지만 당대 현역시인들의 감성대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조사라는데는 이견이 없겠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이 애잔한 노래들을 이땅의 어느 구석에서 구슬피 부르는 시인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원래 시와 노래는 한 갈래였다. 세상의 분업화 때문에 한 부류는 시인이 되고, 또 한 부류는 노래를 하는 가수가 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정서를 글로 표현하여 문학작품으로 남기거나 노래로 불러 세상사람들과 교유하는 일에 큰 차이란게 없다. 그러나 요즘들어 정서적인 시나 감동적인 노래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꺼번에 몰아닥친 디지털 문화의 공습 때문에 다들 가슴이 메말라서일까. 마지막으로 양희은의 절창 한 곡을 낮게 읊조리면서 우리가 회복해야할 감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감성이야말로 시의 요체요, 노래의 요체인 셈이다. 감동이 없는 시나 노래는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사는 동안에 한 번/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