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활판이 그립다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1980년대 중반 내가 처음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그 당시 신문사의 많은 부서 중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곳이 문선부(文選部)였다. 문장을 고르는 부서인가? 그러나 문선부의 풍경은 보통의 사무실과는 사뭇 달랐다. 켜켜이 쌓여 있는 납활자들과 그 사이사이 부지런히 손을 놀려 납활자를 고르는 문선공 형님들. 문선부는 신문이나 인쇄공장 등에서 원고대로 활자를 골라내는 부서였다.
무협지 풍으로 얘기하면 칼로 바람을 가르듯 활자를 골라내서 순식간에 목판에 조판을 해서 문장을 완성하는 문선공 형님들의 신공(神功)은 정말 놀라웠다. 기자가 쓴 원고의 속도보다 활자를 골라내서 조판을 하는 문선공들의 손놀림이 더 빨랐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자음과 모음들이 활자 크기대로 빼곡하게 꽂혀있는데 눈길도 주지 않고 정확하게 핀셋으로 골라내서 문장을 완성하는 솜씨야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신문사는 그 특성상 속도가 생명이다. 마감 무렵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들고 가면 문선부에서 조판을 한 뒤 시험인쇄를 해서 게라지-게라는 활자조판을 담는 춤이 낮고 모가 진 상자, 이 상자에 활자를 조합한 뒤 종이에 시험인쇄를 한 것이 게라지다-를 뽑아준다. 그러면 기자는 그 자리에서 교열을 본 뒤 오케이를 놓는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기자가 쓴 원고의 오자까지 잡아내던 문선공 형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사에 문선부도 사라지고, 납활자와 게라지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 옵션인쇄를 지나 컴퓨터 조판이 자리잡는데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납활자가 몸에 안좋다며 퇴근길에 돼지고기에 소주를 마시던 그 분들이야말로 활판시대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활판인쇄가 된 책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비록 디지털시대의 책과는 선명도나 균형미에 있어서 차이가 보이지만 활자에 대한 존경심은 그때가 훨씬 나았다.
지난해 초판본 모습 그대로 복원된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등의 시집이 큰 인기를 얻었다. 1920년대와 30년대 첫 출간된 허름하고 촌스런 시집이 왜 이렇게 많이 팔린걸까? 책을 구매하는 젊은층들은 “예쁘고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활자본에 대한 향수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 땀 한 땀 쓴 시를 한 자 한 자 골라서 만든 책이 주는 무게감은 요즘의 그것과 다르다. 예전에는 책을 한 권 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요즘엔 마음만 먹으면 단 며칠 사이에도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온라인상에서 얼마든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쓴 글을 많은 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작업 과정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해졌다. 결론적으로 속도의 시대에 느림에 대한 갈망이 10만부가 넘는 대박상품을 만든 것이다. 한때 드라마나 영화들이 앞 다투어 근대문화의 일상을 소재로 제작하여 히트상품을 만들어낸 트랜드와도 연관이 있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를 채택하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 순한글 가로쓰기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이전까지 세로쓰기에 한자를 병용했다. 지금도 네이 라이브러리 옛날신문을 검색하다보면 세로쓰기 신문시절의 기사와 신문을 원본 그대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사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지털 시대의 기사와 활판시대의 기사는 사뭇 다르다. 근대 이후 신문들을 보면 지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촘촘하게 기사를 배치하고, 문장도 간결했다. 동판(銅版)을 떠서 인쇄를 해야 하는 작업상의 공정 때문이었겠지만 그림 하나 사진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기사들, 특히 온라인 기사들을 보면 그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과 길이의 한계가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날림공사를 한 집처럼 허술하다. 그림이나 사진 등도 고르고 골라서 책을 만들고 신문을 만들던 시대와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BBC나 타임지 등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지난 천 년간 인류문화사에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금속활자를 꼽고 있다. 그리고 지금 금속활자 이후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디지털 시대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다.
1377년 <직지>를 인쇄하여 금속활자 인쇄문화를 꽃피운 대한민국에서 근대적인 인쇄시설인 박문국을 설립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하기 시작한 건 1883년이었다. 중세 때부터 인쇄문화로 인해 급격한 발전을 이룬 유럽의 문화에 비한다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 저항의 산물인 <독립신문>이야말로 <직지>를 만들어낸 후손임을 증명하는 쾌거였다.
활판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체험했다. 문맹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만큼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급성장하면서 지식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만약 우리에게 집집마다 배달되던 신문이나 싼값으로 사볼 수 있는 책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독립신문>이 대한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동안 국민들은 신문을 통해 뉴스를 접하고, 소설을 읽었고, 선각자들의 칼럼을 읽으면서 생각들을 성숙시켜 왔다. 심훈의 <상록수>부터 이광수의 <무정>, 정비석의 <자유부인>, 최인호의 <별들이 고향>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을 바꾼 수많은 소설들이 신문을 통해 연재됐다. 또 한편으로는 TV, 라디오, 화장품, 영화 등에 이르는 신문물의 광고들이 신문에 실리면서 도시인들은 물론이고,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신문의 논객들이 칼럼을 통해 정치의식을 고취시킨 덕분에 역사의 고비마다 독립을 외치고, 민주화를 외칠 수 있는 시민의식을 만들어냈다. 그뿐이랴. 활판으로 인쇄된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해 우리는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 요즘도 가끔 옛날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 있는 광고들을 보면서 무릎을 친다. 그 발상의 기발함은 물론 문구 하나하나에 기지가 넘친다.
이 모든 것들의 이면에 매일 밤을 새면서 신문을 만들고, 책을 만들던 이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특히 문선공 혹은 식자공(植字工)들의 노고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온몸에 검은 잉크를 묻히면서 책을 인쇄하고, 신문을 인쇄하던 인쇄공들의 노고도 더해진 결과다.
오늘 다시 근대의 낭만을 생각한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아침마다 잉크 냄새가 가득한 신문을 주워들고 첫 면부터 끝 면까지 샅샅이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명동의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방금 출판사에서 받은 교정지를 받아들고 빨간 볼펜으로 교정을 보던 시인이나 소설가들도 떠오른다. 또 신문 하단에 게재된 양장점이나 양복점 광고 문안을 읽으면서 새 옷을 맞추러 가볼까 고민하는 신사와 숙녀도 있었을 것이다. 그뿐이랴.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영화 광고를 보면서 첫 데이트를 꿈꾸던 처녀와 총각들도 많았을 것이다.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로 시작하는 새 교과서를 받아들고 꿈에 부풀었던 아이들은 어느새 청춘을 다 보내고 노년의 문턱에 와 있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옛것을 보듬으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이 아닐까. 결국 오늘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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