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 배우로서의 시간 59년째
배우 안성기 /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배우 안성기(64)를 도형으로 표현한다면 정육각면체 같은 사람이 아닐까. 변의 길이와 내각의 크기가 모두 같은 정육각면체처럼 안성기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인간의 전형이다. 모든 후배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배우의 멘토이자 한 시대를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초로의 사내로서도 흠결이 없다. 배우로서도 삼각형이나 사각형보다 더 다채로운 이미지를 품고 있어서 보는 이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마력도 있다. 마치 정육각면체를 이루고 있는 벌집처럼 늘 달콤한 꿀을 품고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배우로서의 시간 59년째. 1957년 영화 <황혼열차>에서 아역으로 데뷔한 이후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왔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고래사냥>의 젊은 안성기부터 <칠수와 만수>나 <만디라>에서 개성 넘치는 안성기로, <하얀전쟁>이나 <남부군>에서의 중후한 안성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배우로서의 필모그라피는 정육각면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년이 영화배우로서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각종 영화제는 물론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리에는 언제든지 안성기가 있다. 또 많은 후배들의 결혼식이나 상가에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 안성기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아시아나 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유니세프 홍보대사 등 주로 시간을 쪼개서 봉사해야 하는 직함도 여러개다.
겨울이 끝나가는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안성기는 ‘꽃중년’답게 청바지와 폴라티, 트랜디한 점퍼를 차려입고 나타났다. 사람 좋게 씩 웃는 그에게서 아직도 청년 안성기가 보였다.
-아직도 청년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계신데 비결은?
매일 한 시간여씩 헬스클럽에 가서 꾸준히 운동을 합니다. 러닝머신에서 한 시간 정도 땀을 흘린 뒤 웨이트 트레이닝을 병행하죠. 헬스클럽 쉬는 날은 빼구요. 또 ‘싱글벙글’이라고 배우들을 중심으로한 골프모임이 있어요. 박중훈, 장동건, 차태현, 황정민, 김민종, 김수로, 현빈 등 한창 활동하는 후배 배우들이 거의 다 회원으로 들어와 있죠. 제가 맏형입니다. 촬영스케줄이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필드에 나갑니다.
-영화 <사냥> 촬영을 끝내셨다구요. 촬영하시면서 상당히 고생이 많으셨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어떤 역할이었는지요?
허허, 많이 뛰어 다녔죠. 이우철이라는 신인감독 작품인데 금맥이 발견된 탄광을 배경으로 이를 차지하려 싸우는 주민과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저는 노인 사냥꾼으로 나오죠. 탄광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하다가 후배의 희생으로 살아난 뒤 그의 딸(한예리 분)을 키우면서 살아가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딸이 자신의 손녀였던 겁니다. 탄광 장면 등을 찍기 위해 화순탄광이나 깊은 산 속에서 주로 뛰어다니면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조진웅, 손현주 등 후배들과 촬영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작품 고르실 때 기준은?
작품의 완성도를 많이 생각합니다. 저예산 영화라도 좋은 영화는 출연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음 작품이 <매미소리>라고 다큐멘터리 인디영화로 큰 화제를 모았던 <워낭소리>의 이충열 감독이 만드는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요.
-지난해에는 할리우드 영화 <제7기사단>에도 출연하셨는데요?
허허. 그 영화가 개봉은 했는데 큰 반향이 없이 묻혀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모건 프리먼이나 클라이브 오웬 같은 유명배우들도 많이 나오는데…. 사실 워낙 제가 합류가 늦어져서 의상이나 헤어컨셉이 미진해서 좀 아쉬웠어요. 그리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잘 하려고 하다 보니 힘들었죠. 앞으로 그런 기회가 또 온다면 좋은 작품과 역할로 좀더 잘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배우로서도 좋은 경험이었죠.
-<화장>의 임권택 감독이나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을 빼면 이제 대부분 후배 감독과 연기하는 일이 많으시죠. 장단점이 있을 텐데요.
현장에 가면 늘 제 나이가 가장 많아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닐까 해요. 영화예술이라는게 나이가 든 사람들의 지혜로움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섞여야만 하는데 요즘엔 그런 부분이 없어서 아쉽죠. 제가 아는 촬영감독이나 스테프들 모두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찍으니까 장면들이 힘도 있고 스피드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백이 없어 보여서 아쉬워요. 영화의 깊은 감동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합쳐쳐야 나오거든요. 그런데 요즘 그 쪽이 약하다보니 예전에 비해 작품성 있고, 세계성 있는 작품이 드물어졌죠. 천만영화는 많아졌지만 우리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관통하는 연기인생을 보내고 계신데요? 어려운 점은?
영화가 디지털화 되면서 우리 영화가 국제적인 경쟁력 갖게 됐죠. 이제는 헐리우드 영화와 뒤질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정확한 콘티를 가지고 필름을 아껴가면서 찍지 않고 마구잡이로 찍다보니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단점도 있어요. 특히 배우들이 쉴 틈이 없어서 힘들죠.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어도 영화의 정서 자체는 아날로그 적인게 묻어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상당히 아쉬워요.
-많은 후배들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멘토를 안성기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 말 들으시면서 부담감이 없으신지요?
왜 부담이 없겠어요. 더욱 잘해야 겠다는 생각을 늘 하죠. 또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배우의 정년을 연장해놔야 하겠다는 사명감도 있어요. 우리는 배우가 너무 단명하는 것 같아요.
-뭐든지 한 번 시작하시면 줄기차게 하시는 거 같아요. 유니세프 홍보대사도 그렇고, 동서식품 광고모델도 그렇구요.
재능기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거라고 봐요. 유니세프는 저와 같은 전쟁세대들이 어린 시절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국제구호단체입니다. 우리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손길을 준 세상에 대한 보답으로 서로의 아픔을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1992년부터 홍보대사로 활동했어요. 실제로는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기부하고 활동했습니다. 동서식품 광고도 1983년 시작했으니 꽤 오래한 셈이죠.
-평소에 독서는?
예전에는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인물 분석에도 도움이 되고. 요즈음은 예술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어요.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로서 생활해오셨는데 삶의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지?
살아가면서 한 번씩 어렵고 힘들 때마다 저를 좀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줍니다. 결혼 하면서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어요. 그런데 집안애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계셨죠. 저도 영세가 늦었을 뿐이죠.
-두 아드님들이 모두 예술계통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한 명 정도는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으셨는지요?
두 아들이 무조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저와 아내의 생각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큰 아들은 그림을 전공하고 있고, 둘째는 사진을 전공한 뒤 지금은 영화 쪽 공부를 하고 있어요. 큰 아들 녀석은 제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림을 꽤 잘 그리는 것 같아요. 잘하면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둘째는 아직 모르겠어요. 잘 하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쪽에서 일할 것 같아요.
-예술적 재능은 누구를 닮은 건가요?
글쎄요. 골고루 닮은 거겠죠. 제 처도 조소를 전공했으니까요.
-자녀들에게 어떤 어버지인가요?
정겹게는 못하는 거 같고 조금은 엄한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면서 자식들과 거리감이 없는 부모들이 많은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얻은 자식들이어서인지 그렇지는 못해요. 엄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아버지라고나 할까요.
-드라마나 뮤지컬 등 제의가 많았을텐데? 영화만 고집하신 이유는?
요즘은 드라마나 뮤지컬에 출연하자는 제안 자체가 없어요. 80년대에 주로 드라마 출연제의가 많았는데 웬지 너무 쉽게 볼 수 있고, 화면도 너무 작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 비해 영화는 관객의 선택으로 돈을 내고 들어와서 집중을 해서 보잖아요. 관객의 수고와 선택을 위해 제가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만 고집했죠. 또 얘기를 들어보면 쪽대본으로 시간에 쫓겨 밤샘촬영을 한다는데 저는 절대로 못할 거 같아요.
-지난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둔 중년의 남자 연기를 하셨죠. 늙어간다는 것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텐데요.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50대가 됐을 때 그 전과는 확 달라진 삶이 보이더군요. 이제는 오르막은 다 올라왔고 내려가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꾸만 되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다짐을 했죠. 그래도 모든 일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인터뷰나 영화를 고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실수나 실패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젊은 시절에는 실패해도 다시 복구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게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굼떠져요. 그래도 하나 변치 않는 건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거겠죠.
-사람들에게 늘 바른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데 이런 것들이 가끔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지금 맡은 역할에 충실해야겠다는 각성을 가져다주죠. 제가 악역을 잘 안하는 이유는 제가 별로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머가 있는 코미디영화를 좋아해요. 그런데 그런 영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청룽(성룡)이 한 가지 캐릭터만 하는 이유는 그것만해도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이라잖아요.
- 너무 바쁘셔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으실텐데요.
제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늘 노력하죠. 배우에게 바쁜 건 독약입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빈둥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죠. 저는 항상 기지개를 켜기 직전 같은 상태로 몸을 만들어 놔요. 많은 상상을 통해서 생각의 깊이를 만들어놔야 연기할 때 저 깊은 곳에서 꺼내놓을게 생기거든요.
-나이 들면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과는 자주 만나시는지요?
그럼요.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요. 정년퇴직한 친구도 있고, 사업하는 친구도 있구요. 소주도 마셔가면서 옛날 얘기도 하고, 요즘 사는 얘기도 하죠. 제가 초등학교 동창은 별로 없고, 중학교 동창들이 많아요. 초등학교 때는 영화촬영 다니느라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거든요?
-아, 가수 조용필씨가 중학교 같은반 친구였다면서요?
네. 경동중학교 2학년때 같은 반 친구였어요. 용필이는 그때 키가 지금 키랑 똑같아요. 강화도에 소풍가서 기타치고 놀면서 찍었던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더라구요.
-신혼시절의 아내와 지금의 아내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60대가 넘으면 ‘마누라’한테 쥐어 사는 게 편하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살아가다보니 각자에게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서로 많아지면서 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생깁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저는 좀더 소심한 남편이 됐고, 제 아내는 좀더 씩씩한 아내가 된거죠. 되도록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재테크나 금전관리는 누가 하시는지?
아, 그런 거는 서로 미루는 거 같은데요. 은행에서 한 달 동안 쓸 생활비를 찾아서 빼서 쓰는 거 외에 별다른 관리를 안합니다. 저나 집사람이나 재테크를 하는 성격이 못되거든요.
-자신의 전성기가 언제였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80년대를 시작으로 90년대까지 전성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도 기사를 보면 ‘안성기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더군요. 그 말을 빌어서 안성기의 전성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아직도 작품에 대한 열정은 후배들 못지 않았다. 촬영현장에서 그는 후배들보다 더 잘 뛰고 더 잘 논다. 배우로서 끊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은 어쩌면 낙천적인 성격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안성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스라고 말하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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