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용필과 나훈아, 조영남이 한 무대에 선다면?
정말 꿈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가왕의 반열에 오른 세 가수가 한 무대에 서는 건 불가능 하다. 더군다나 나훈아와 조용필은 그들의 콘서트에서도 게스트를 세우는 법이 없다. 과거 라이브에이드 공연이나 위아더월드 같은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만들면 이들 대형가수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여전히 현장에서 파워풀한 공연을 펼쳐보이는 스타들이지만 함께 무대에 서기에는 음악적 공통분모가 적고, 각자의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과거 사진들을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다가 1982년 5월에 전남 광주에서 이들 세명의 스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이리저리 확인해 본 결과 이 사진은 그 당시 광주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빅쇼>의 출연을 위해 내려갔던 세 사람이 경향신문 사진기자의 요구로 함께 포즈를 취한 것이다. 그날 ‘잘 나가는 가수 3인방’이 생방송 무대에 섰던 것이다.
사진 속 세 스타는 말 그대로 ‘청춘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중이다. 1950년생인 조용필은 막 서른살을 넘긴 나이다. 사진 속 장발의 조용필은 아직 미소년 같은 외모다. 1979년 ‘창밖의 여자’를 발표한 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조용필은 ‘촛불’,‘미워미워미워’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같은 해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로 시작하는 노래 ‘비련’을 발표하여 가는 데마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트로트에서부터 발라드, 팝, 민요풍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소화하면서 훗날 ‘가왕’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는 입지를 굳혔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결혼 전이어서 뭇 여성팬들이 설렜을 것이다.
나훈아는 그당시 35세의 나이였다. 그는 1982년 6년간 같이 살던 영화배우 김지미와 전격 이혼을 발표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진을 촬영한 직후 이혼발표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혼의 이유는 81년 11월 나훈아가 다시 가요계로 복귀하면서 바빠진 스케줄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 졌다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그 이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지는 않다. 여하튼 1976년 세상을 놀라게 한 두 사람의 결혼은 숱한 화제를 낳았다. 두 사람은 대전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면서 함께 살았다. 훗날 나훈아의 고백에 의하면 그당시 김지미의 권유로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으며, 어학공부도 했다. 짧은 시기였지만 나훈아로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았던 시절이었다.
1982년초 조영남은 미국에서 영구귀국했다. 1974년 탤런트 윤여정과 결혼한 뒤 훌쩍 미국으로 떠났던 조영남은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했다. 귀국과 함께 <한국청년이 본 예수>라는 묵직한 주제의 종교에세이를 펴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귀국하여 공연만 하던 조영남을 두고 사람들은 ‘돈만 챙겨가는 유랑가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당시 조영남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37살이었다.
2020년 봄, 저 사진 속 청춘들은 모두 70대 초로의 장년이 됐다. 한 가지 공통점은 세 사람 모두 여전히 왕성한 현역 가수로 활약하면서 대한민국 가요계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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