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에서 어떤 사건은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바뀐다.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맛본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사건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역사의 흐름이 바뀌면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의 운명도 바뀐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대중문화가 근래 들어서 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그 역사 속에서 결정적 사건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을지도 모른다. 지난 100년 역사 속에 변곡점이 됐던 대중문화계 사건과 사고를 짚어본다. 단순한 사건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대중들은 자극을 얻거나 변화를 택한다. 그 결정적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필자 주>
1920대 발행되던 여성지 <신여성>의 표지. 윤심덕은 당시 손꼽을 만한 신여성 중 한 명이었다.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김수산, 여자는 윤수선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라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은 즉각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극작가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소프라노 윤심덕은 처녀였기에 불륜에 쏠린 대중들의 관심이 더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심덕은 배를 타기 직전 오사카의 닛토레코드사에서 ‘사의 찬미’를 취입했으며, 레코드가 발매되자마자 5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쯤 되자 대중들 사이에서 음모론이 돌았다. 레코드사에서 이들 두 사람을 자살로 위장하여 빼돌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년 뒤에 김우진의 가족들은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여 공식 수사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나 허위로 밝혀지기도 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누구인가? 윤심덕은 가난한 집안의 4남매의 차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교사의 영향으로 공부하여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했으며, 춘천 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녀는 22세 때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시험에 1등으로 붙어서, 동경 고등음악학원 음악교육학과에서 성악 전공하여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가 된다. 목포 갑부집의 아들로 태어난 김우진은 청소년기부터 문재가 뛰어났다. 1918년에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거쳐 1924년 3월에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해 6월에 목포로 귀향해 ‘상성 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지만 정작 회사 운영보다 문학적 포부가 컸기에 부친과 갈등을 빚었다. 1925년에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그린 희곡 ‘이영녀’를 발표했고, 대표작으로 ‘난파(難破)’와 ‘산돼지’등의 희곡이 있다.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었다. 그는 또 연극평론과 문학평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를 통해 계몽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21년 7월 ‘동우회 순회연극단’에서였다. 동경 유학생들의 연극연구단체인 동우회가 극예술협회와 제휴해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내 순회극단공연에 나섰다. 김우진이 연출을 맡았고, 연극 막간에 홍난파의 연주와 윤심덕의 독창도 있었다. 윤심덕은 1923년 귀국 후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성황리에 첫 독창회를 열었지만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었다. 윤심덕은 김우진이 유부남이었음에도,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그에게 기댔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사의 찬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한국어로 일본에서 녹음한 최초의 앨범이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최초의 앨범이 됐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인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김우진이 가사를 붙여줬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레코드사는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을 계기로 이 노래를 집중적으로 홍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은 유명인의 죽음에 관심을 둔다. 그 심리적 측면은 한편은 측은지심이고 또 한편은 호기심이다.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요소를 갖고 있었기에 레코드사가 절호의 마케팅 기회를 날려버렸을 리가 없다.
윤심덕
김우진(사진 아래)과 그가 남긴 유고
그 당시 한반도에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축음기가 채 2,000대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윤심덕의 음반이 5만 장이 넘게 팔린 것이다. 당시 레코드판 한 장을 사려면 쌀 한 가마니 이상의 고가였으니, 축음기는 웬만한 재산가가 아니면 사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결과적으로 윤심덕은 축음기 보급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여하튼 우리 대중음악의 여명기를 열어젖힌 노래가 죽음을 찬미하는 노래이고, 그 노래를 부른 당사자는 자살로 막을 내린 비운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많은 지식인이 허무주의적인 감성을 담은 이 노래를 듣고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의 생산물은 대중을 위로하거나 행복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그 매개체가 갖는 매력이 클수록 상업적인 성공을 불러오는 것이다.오광수<경향신문 부국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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