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것을 바꾼다. 우리에게도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수 많은 희생자와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 상처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좀체로 극복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때 부산은 임시수도였다. 평소에는 서울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우리나라 제1의 항구도시다. 그런 도시가 전쟁 때문에 피난민으로 차고 넘치는 도시가 된 것이다. 부산은 평양이나 서울을 떠나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 임시로 정착했던 도시다.
기록에 의하면 피난시절 도미도레코드사, 미도파레코드사 등 서울에 있던 레코드사들이 부산이나 대구로 내려가서 음반을 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문화는 침체됐지만 용케도 노래를 만들고, 레코드도 제작한 것이다. 당시의 노래들은 대부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 전장으로 인한 상처를 위로하는 노래들이 유행했다.
현인은 부산이 낳은 싱어송라이터다.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토 창법 때문에 개성이 확실하다. 부산 영도다리 입구에 피난 시절의 애환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와 이 노래를 부른 현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부산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굳세어라 금순아’는 부산을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노래라서 부산 사람들은 늘 현인을 기억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질 때/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중에서
박시춘이 작곡하고, 그의 친구 강사랑이 작사했다. 한국전쟁에서 흥남부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1950년 12월 15부터 24일까지 펼쳐진 ‘흥남 철수 작전’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당시 미 1해병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10배에 달하는 12만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10만명의 피란민을 구출했다. 이 피란민들이 배를 타고 흥남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했다. 그 탈출 와중에 잃어버린 여동생 금순이를 목놓아 찾는 노래가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다. 이 노래는 1953년 발매되자마자 국민가요로 떠올랐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국제시장은 피란민들에게 생활의 터전이자 전쟁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수소문하는 광장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무대였던 이곳은 전쟁 당시 온갖 군수물자들이 흘러나와 거래됐으며 일본에서 들어온 물자들까지 넘쳐났다. 물자는 넘쳐났지만 전쟁 와중에 전국 8도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늘 춥고 배고팠기에 시장통을 누비며 악다구니를 써야 생존할 수 있었다. 국제시장이 전쟁통 삶의 용광로였다면 부산역은 도착하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로 북쩍이는 역이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4년) 중에서
유호가 쓰고, 박시춘이 작곡하여 남인수가 부른 이 노래는 부산 피난시절의 애환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대변한다. 남쪽의 끝에 있는 부산역은 지형적으로는 종점이었지만 피란민들에게는 잠시 거쳐가는 간이역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남쪽 끝까지 밀려왔지만 언젠가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갖고 살았다. 전쟁이 사랑까지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한 많은 피난살이에 서로 의지하며 사랑을 꽃피웠던 경상도 처녀와의 이별이 애처로울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한 노래가 한두 곡이 아니지만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단장(斷腸)’은 말 그대로 장을 끊어내는 듯한 고통을 말한다. 노랫말을 쓴 원로가수 겸 작사가 반야월은 전쟁 때문에 겼어야 했던 고통스런 기억을 노래로 만들었다.
1950년 9월초, 피란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반야월의 처 윤경분은 어린 딸과 함께 피란길에 나섰다. 서울 미아리고개를 막 넘었을 때 허기를 견디지 못한 어린 딸이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서 숨을 거뒀다, 남편 반야월과 재회한 뒤 미아리고개에 와서 딸의 무덤을 찾았지만 끝내 보이지 않았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눈물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울고 넘던 이별 고개.’
딸을 잃은 슬픔을 담았던 이 시가 노랫말이 되어 1956년 가수 이해연(2019년 작고)의 목소리로 처음 불려진 후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국민가요가 됐다.
해방 전에 남인수가 남자가수의 대명사였다면 해방 이후엔 누가 뭐래도 현인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가수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노래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현인이 1·4후퇴와 흥남철수를 배경으로한 노래를 불렀다면, 남인수는 전쟁이 끝나면서 새로운 희망을 향해 떠나는 피난민들의 심정을 노래로 불렀다. 어쩌면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목소리가 이들 노래를 소화하는데 있어서 최적화 됐기에 크게 유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전쟁 이후에도 유독 부산을 배경으로한 노래들이 많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제2의 도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부산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 정서도 한 몫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용두산 엘레지’,‘부산 갈매기’나 ‘돌아와요 부산항에’등 수도 없이 많은 부산 노래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봄이 가기 전에 꽃 피는 동백섬에라도 가봐야 겠다.
오광수(시인, 경향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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