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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뒷담화

중국열병식과 제식훈련변천약사

 

 

 

                1970년대 총검술 훈련중인 고교생들. 경향신문 사진부. 

 

중국열병식과 제식훈련변천약사

 

 

 

하나, 하나! 왼발, 왼발! 오와 열, 오와 열!중략그는 반평생을 연병장 아니면 운동장에서 보낸 사나이답게 군중을 휘어잡는 재간을 터득하여 비상금처럼 휴대하고 다녔다.’

 

70년대 발표된 소설가 윤흥길의 단편 제식훈련변천약사(諸式訓練變遷略史)’는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1급 정교사 강습을 받게 된 중·고교 체육교사들의 제식훈련을 소재로 당대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수작이다. 집단이 내세우는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유린되는 현실을 풍자하면서 나아가서는 군부독재의 폐해를 고발한 작품이었다.

 중국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서 거행한 열병식을 보면서 이 소설이 떠올랐다. 오와 열이 생명이고, 일체의 잡념이 허용되지 않으며 개인행동은 눈을 껌벅이는 것조차 허용이 안되는 열병식은 철저하게 군대문화의 상징이다.

 

 나 역시 고교시절 제식훈련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에 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오와 열이 생명인 제식훈련은 물론 총검술 16개 동작, M1소총 분해와 조립 등 일찌감치 군대맛을 봐야 했다. 나 뿐만 아니라 70년대와 80년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기억이리라. 그 시절에는 매년 6·25에 맞춰 각 학교 대항 교련실기대회를 개최했다. 실기대회가 다가오면 매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련선생의 지도하에 일사불란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하고, 정확한 총검술과 신속한 소총 분해조립을 연습해야 했다.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훈련이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교련선생의 매타작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어느 학교나 폭력의 주범은 평생 연병장이나 운동장에서 오와 열을 맞춰온교련선생이었다.

 

 하필이면 그 무렵 고인이 된 박목월과 박두진 시인의 문학강연회가 내가 살던 도시에서 열렸다. 문예반 친구들끼리 강연회에 가기로 한 날, 교련선생은 오와 열이 제대로 맞을 때까지 훈련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나는 교련선생 앞으로 나가서 강연을 들어야 하니 문예반 친구들을 훈련에서 열외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 대답으로 돌아온 건 교련선생의 2단옆차기와 험악한 욕설이었다. “이 빨갱이 같은 놈. 너 같은 녀석은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도망갈 놈이야.”

결과적으로는 그날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국어선생님의 중재 끝에 퉁퉁 부은 얼굴로 문학강연회를 들었다. 총검술과 구호가 난무하던 운동장을 벗어나 강나루 건너 밀밭길로 여행을 떠났지만 통증 때문에 행복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살면서 수많은 교련선생의 분신들을 만나야 했지만, 80년대 독재에 항거한 투사들 덕분에 교련선생들의 분신은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국민들에게 마구잡이로 오와 열을 강요하던 파시즘적인 사회적 분위기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오늘, 남과 북은 국민들의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다니는 기막힌 시대를 살면서 열강들의 힘을 과시하는 살풍경한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민주화의 퇴행과 남북경색을 지켜보면서 파시즘 초기증세라고 비판하셨던 영원한 언론인 리영희 선생마저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의 우려처럼 국민들에게 오와 열을 맞춰 줄서기를 강요해온 얼치기 보수세력들은 민족의 화해와 협력에 의한 평화통일 원칙을 깡그리 날리는게 다반사다. 남북의 긴장을 최고조로 올려놓고 다시 대화로 풀어가겠다면서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박근혜정부의 진심도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또다시 작가들이 제식훈련변천약사후편을 써야 하는 시대를 맞을 것인가. 우리 아이들이 왼발이 나갈 때 오른발을 내디뎠다고 이단옆차기를 당하지 않게 하려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 야만과 폭력에 대항해야 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박근혜정부도 평화와 통일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