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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뒷담화

내 친구와 국정교과서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오열하는 아주머니들.

 

  내 친구와 국정교과서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나는 두말할 필요없이 국정교과서 시대에 공부했다. 김명수 시인의 시처럼 모든 것을 ‘아니다’ 하면 ‘아니다’로 읽고, ‘그렇다’ 하면 ‘그렇다’로 읽던 시대를 산 것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는 국민교육현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10월유신이 공표됐을 때는 뭔지도 모르고 10월 유신의 이념을 머릿속에 주입시켜야 했고, 시도때도 없이 간첩식별요령을 암구호처럼 외워야 했다. 매일매일 국기 하강식에 거수경례를 하는 건 물론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국민교육헌장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고, 이른 아침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등으로 시작되는 간첩식별 요령도 머릿속에 뚜렸하다.
 최근 국정교과서 부활논란을 접하면서 70년대 고등학교 시절 한 수업시간의 사건이 떠올랐다. 그당시에는 국사와 분리하여 정치경제 과목이 따로 있었다. 선생께서 5.16 군사혁명에 대해 열강 중이셨다. 구국의 일념으로 똘똘 뭉친 군인이었던 박정희 소장이 썩은 정치상황에 울분을 참지 못해 목숨을 건 혁명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혁명정부를 이끌던 박정희는 국민들의 간청에 못이겨서 눈물을 흘리면서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됐다는 식이었다. 물론 그 교과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궁핍했던 대한민국을 눈부시게 발전시켰고,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을 걷어내고 농가소득을 끌어올려 눈분시게 발전시켰다는 내용도 실려있었다. 그 말미에는 시월유신의 정당성이 아주 길게 기술된 국정교과서였다.
 수업할 때마다 유난히 침이 많이 튀기던 선생님의 열강이 계속되던 차에 나와 아주 친했던 같은 반 친구가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 질문했다.
 “선생님,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라고 준 총으로 국민들을 위협하여 나라를 빼앗았는데 어째서 혁명입니까? 쿠데타 아닙니까?”
 순간 선생님의 얼굴이 벌개지더니 다짜고짜 친구를 불러내서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 빨갱이 같은 놈. 너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꼴이 그 모양이었다니까.”
 선생이 너무 흥분하여 뺨 때리기를 멈추지 않자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몇몇 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몰려들 기세였다. 선생은 교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수업도 끝나지 않았는데 출석부를 들고 서둘러 교실을 나갔다.
 친구들은 얼굴이 손자국으로 벌개진 친구들 옆에 몰려들어 “잘했다. 속이 시원하다”면서 친구를 위로했다. 내 친구의 ‘질문’이 전교생에게 퍼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친구들 이름을 넣어 ‘OOO 혁명’이라고 불렀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우리들의 작은 영웅’이 됐다.
 어찌보면 당연했던 내 친구의 질문이 선생에게 폭력으로 응징당했지만 그 질문이 불씨가 되어 더 큰 사건으로 번졌다. 사건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초여름날 전교생은 영문도 모르고 학교운동장에 집합했다. 그당시 관제의 이름으로 학교마다 반공궐기대회를 갖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날씨도 더운데 왜 또 우리를 귀찮게 하는거야 하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구호를 따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줄지어 있는 앞으로 흥분한 표정의 영어선생님이 다가오면서 외쳤다. 4.19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대학을 다니면서 거리로 나섰던 경력이 있는 ‘투사 출신’ 선생님이었다.
 “야 이놈들아. 니놈들이 불알 두 쪽 찬 사내가 맞아. 아무 생각없이 끌려나와서 뭔 얘긴지도 모르고 구호나 따라하고.”
 평소 온화했던 선생님의 표정에서 분노가 읽혔다. 그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렸다. 누군가 놀랍게도 “독재정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친 것이다. 순식간에 학생들의 구호가 바뀌었다. 70년대 긴급조치가 내려진 서슬 퍼렇던 시절에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독재정권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터져나오다니.
 당황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는 누군가가 교문 밖으로 나가자고 외쳤다. 그러나 그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교문 앞에 철길이 있어 커다란 육교가 있었다. 육교를 봉쇄하면 교문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했다. 선생님들이 육교 앞에서 스크럼을 짜서 학생들을 막았고, 결국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설득으로 교실로 돌아갔다.
 그 사건이 그대로 덮어지게 된 건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일설에 의하면 교장선생님이 관할 경찰서 서장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처벌받거나 퇴학 당하지 않고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은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건 내 친구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 이후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가 배우고 있는 교과서에 대해 늘 질문하게 됐으니 말이다.
 나와 문예반에서 활동하면서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 친구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택했다. 한 명은 대학에 또 한 명은 육사에 입학하여 서울로 올라온 두 촌놈은 틈날 때마다 만났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와 달리 만나면 토론이 길어졌다. 10.26과 5.17로 이어지는 그 격변의 시기에 육사생도 혹은 육군 장교 신분의 친구와 대학에서 최루탄 가스에 길들여진 학생이거나 초년병 기자와의 만남은 오랜 우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 친구는 얼마전 육군 장군으로 진급했다가 예편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나라가 혼탁하니 혁명을 해야하겠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않고, 군인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아직도 여전히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 분노를 느낀다. 왜 국민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오와 열을 맞추라고 강요하는가? 우리는 그 불편한 세상과 결별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싸워오고 피를 흘렸나. 또다시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아니다, 아니다’라고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