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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방황하는 청춘들의 암구호, 김현식

 

                                   영원한 청춘으로 남은 김현식,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방황하는 청춘들의 암구호, 가객 김현식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 발길에 부딪치는 사랑의 추억 / 두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이여. /  이제와 생각하면 당신은 / 내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 나에게 심어 주었죠.’
 늦가을이 되면 늘 생각나는 가수와 노래가 있다. 그 이름 김·현·식, ‘사랑했어요’다. 지금은 명반으로 기억되는 그의 2집앨범에 수록된 이 노래는 그의 다른 노래들과 사뭇 다르다. ‘어둠 그 별빛’이나 ‘바람인 줄 알았는데’ 등이 수록된 2집 앨범 속 김현식의 보이스는 특유의 스크래치로 거칠게 포효하는 느낌의 창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밀리언셀러로 남은 6집 수록곡이나 그때 불렀던 ‘사랑했어요’와 비교해봐도 확연하게 다르다. 훨씬 맑고 청아한 젊은 김현식의 목소리가 가슴에 와닿는다. 마치 펄펄 뛰는 숭어나 가물치의 힘이 느껴진다.  
 작사·작곡을 할때 몽당연필을 주로 썼다는 청년 김현식이 마치 고려가요 ‘가시리’를 연상케하는 애절한 노랫말을 썼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이라는 정서는 그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듣는 이의 가슴을 친다.
 가객 김현식의 탄생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0년 그는 이미 ‘봄여름가을겨울’이나 ‘주저하지 말아요’등이 수록된 1집 앨범을 냈다. 84년 어느날이었다. 훗날 한국 대중음악사의 풍성한 성지가 된 동아기획의 김영 대표와 김현식이 광화문 작은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동아기획 김영 대표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통기타 붐이 일던 무렵 스무살 약관의 나이로 기타학원을 차려서 큰 돈을 벌었던 청년 사업가였다. 그는 광화문에 박지영레코드를 운영하면서 쌓아놓은 노하우로 대한민국 음반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겠다는 신념으로 출사표를 던진 젊은 기획자였다.
 “김현식의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았어요. 그 친구를 처음 보는 순간 ‘아 이거 물건이구나’ 생각했죠. 건방지고 오만하고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친구였어요.”
 당시의 가요계 분위기로는 음반을 내주겠다는 기획사 사장이 갑이고, 음반을 내고 싶어하는 가수가 을이 되는 게 인지상정. 1집을 낸 가수라고 하지만 김현식은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가 김영 사장(가수들은 그를 대장이라고 부른다)에게 만나자마자 여러가지 요구조건을 내건다. 전 매니저에게 위약금을 물어주고, 방송 출연은 절대 안할 것이며,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 안한겠다 등등. 김영 사장은 그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수용하면서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그가 부른 노래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 흔한 오디션조차 보지 않았다.
 84년 9월 나온 김현식의 2집은 ‘사랑했어요’ 외에도 ‘바람인 줄 알았는데’‘변덕쟁이’‘당신의 모습’등이 수록됐다. 편곡은 김명곤이 맡았고 드럼의 배수연, 기타의 최이철 등 훗날 대한민국 최고의 세션으로 성장하는 이들이 앨범녹음에 함께 했다.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마치 콘서트를 하듯 세션맨들과 가수가 모두 녹음실에 들어가 녹음했다. 스튜디오 사용 시간에 따라 녹음비를 지급해야 했기에 시간이 돈이던 시절, 김영 사장은 마치 연습하듯 몇 번이고 녹음실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 뒤 가장 완벽한 노래들을 골라 앨범에 수록했다.
 그당시에는 앨범을 내면 LP를 짊어지고 각 방송사를 돌면서 라디오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촌지까지 줘 가면서 홍보를 했다. 그러나 젊은 제작자 김영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가용에 앨범을 싣고 전국 각지의 레코드샵을 돌았다. 박카스 한 박스를 레코드샵 주인에게 안겨주고 앨범을 진열해 달라고 요청하고, 다음번에 갈때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당시엔 소위 음악다방이 끝물이었던 시절, 음악다방의 DJ들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홍보했다.
 앨범을 내놓은 김현식 역시 홍보에 나서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았다. 이미 결혼하여 아들 완제까지 둔 그는 그의 생활터전이었던 나이트클럽 무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김현식은 섹소폰 연주자인 정성조가 이끌던 그룹 ‘메신저스’의 보컬이었다. 베이스는 나중에 하나음악을 이끄는 조원익, 그리고 여성보컬은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던 유연실이었다. 그가 비록 TV나 라디오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나이트 클럽에서는 여성팬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특급스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현식의 앨범이 팔려나가기 시작한건 동아기획이 이듬해 내놓은 그룹 들국화의 데뷔앨범이 히트하고 나서였다. 들국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동아기획이 이보다 앞서 내놓았던 조동진, 우순실, 김현식의 앨범도 같이 팔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꾸준하게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홍보를 했던 김영 대표의 마케팅이 성공한 것이다.
 85년 김현식은 김종진과 전태관, 그리고 고 유재하 등과 함께 그룹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조직하여 활동한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의 황태자를 무너뜨린건 술과 마약이었다. 김영 대표는 그의 알콜중독과 마약복용을 중단시키기 위해 병원에 입원도 시켰지만 끝내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90년 11월 1일 세상을 뜬다.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 이 마음 다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생각해보니 김현식은 우리 젊은날의 바이블이었고, 암구호였다. 아직도 그의 콘서트장을 가득 메운 여성팬들의 ‘울부짖음’을 잊을 수 없다. 아 잘생긴 놈이 노래도 저렇게 잘하다니. 난 아직도 이땅에서 그를 능가하는 보컬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