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의 맏형 조용필, 경향신문 사진부
조용필과 아이들, 방배동 노래방습격기
벌써 10년도 넘은 2004년의 일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날 저녁에 서울 방배동 조용필 형의 빌라에서 그와 마주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 출신이자 ‘삐삐밴드’ 등 재기발랄한 록음악을 제작하여 세상에 내놓은 송홍섭씨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들른 조용필 형의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예전 같으면 형수인 안진현씨가 손수 끓인 김치찌개에 소주를 내놓으면서 조금만 드시라고 했을 터인데 황망간에 세상을 뜨셨으니 넓은 집이 더욱 썰렁해 보였다. 일하시는 아주머니도 퇴근한 뒤였기에 용필이 형이 냉장고를 주섬주섬 뒤져서 김치며 밑반찬을 늘어놓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서 나눈 얘기도 늦가을의 쓸쓸한 풍경처럼 헛헛한 얘기들이었다. 그때도 일주일이 멀다하고 돌아가신 형수의 묘소에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형수에 대한 추억과 뮤지컬 얘기, 최근 대중음악계의 현실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듯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90년대 이후 밀리언셀러들이 양산되면서 젊은 가수들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시절을 지나 디지털시장의 급격한 부상으로 음반시장이 음원으로 넘어가면서 불황을 겪던 시기였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나서 송홍섭씨와 내가 조용필 형에게 즉석제안을 했다. “형이 가요계 맏형이시니 후배 가수들을 불러 용기를 북돋우는 송년회를 한 번 하는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평소 나서기를 꺼려하는 조용필 형은 흔쾌하게 그 제안을 수용했다.
그해 겨울 ‘별들의 회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자리에서 조용필 형이 이런저런 가수들이 포함됐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지만 자리를 마련하고 가수들을 초청하는건 주로 형의 기획사인 YPC 실무진들이 고생했다. 그리고 12월 20일 저녁 63빌딩 거버너스홀에 유명 가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모두들 연말 일정에 바쁜 스타들이었지만 예정된 공연이나 생방송 등으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가수들 외에는 모든 일정을 작파하고 자리를 함께 했다. 가수 이승철, 김현철, 윤종신, 이현우, 김진표, 김정민, 김원준, 홍경민 등 남자가수들과 한영애, 이은미 등 여자가수가 자리를 함께 했다.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전태관, 윤도현밴드, 그룹 god, 클래지콰이, 롤러코스터 등을 비롯하여 송홍섭씨와 한상원, 최원혁, 신윤철 등 연주인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별들의 잔치’였다.
그날 작은 소동도 있었다. 여전히 당사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이해하리라 믿고 그 ‘소동’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자. 모임이 시작될무렵 가수 임재범이 검은 외투를 휘날리면서 송년회장에 들어섰다. 대개의 가수들은 조용필 형 자리에 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명패가 있는 자리에 착석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임재범은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다짜고짜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 조용히 김종진과 전태관을 불러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여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임재범이 험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봄여름가을겨울이 그들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얼마전 펴쳐졌던 임재범 콘서트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너무너무 기다려온 임재범 콘서트에 갔던 한 청취자가 예전과 같은 폭발적인 가창력이 보이지 않아 실망했다는 내용의 사연을 프로그램에 보냈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이 사연을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것이다. 그당시 임재범은 갑작스런 잠적과 도피로 예정된 콘서트가 취소되는 등 말썽이 많았다. 그를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기대치가 엄청 높았지만 기대에 비해 다소 모자랐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에야 ‘나는 가수다’등을 통해 입증해보였기에 임재범의 가창력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당시 임재범은 다소 불안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 불똥이 진행자인 두 사람에게 튄 것이다. 우연히 방송을 듣게된 임재범이 격분했고, 행사장에서 봄여름가을겨울과 마주치자 욱하는 성미를 참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한 것이다.
여하튼 주변 사람의 만류로 그 소동은 임재범의 퇴장과 함께 일단락 됐다. 임재범은 애시당초 조용필 형이 ‘노래 잘하는 후배’ 영순위로 꼽으면서 꼭 초대하라고 얘기했던 후배가수였기에 그의 돌발행동이 아쉬웠다.
여하튼 그날 윤종신의 사회로 진행된 그날 모임에서 조용필 형은 “음악인들끼리 모여서 덕담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면서 “경제가 어렵고 음반산업도 안좋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어려움을 이겨내자”면서 후배들을 격려했다. 후배들도 “이렇게 많은 가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조용필 선배니까 가능하다”면서 “오늘을 계기로 모임이 계속되고 의미있는 일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별들의 회동’이 본격화된 건 그날밤 자정무렵 방배동의 노래방이었다. 예정에 없던 2차 회동이 급하게 마련된 것이다. 방배동 노래방 중에서 가장 큰 방을 갖고 있는 노래방으로 2차 장소가 마련됐고, 2차 장소를 통보받은 가수들이 하나둘 노래방에 모여들었다. 대한민국 노래방 역사상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노래를 부른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여하튼 그날 노래방에서는 가수 이승철의 사회(?)로 톱가수들의 조용필 히트곡 경연대회가 펼쳐졌다. 이승철, 이은미, 이현우, 김경호, 조PD, 윤종신,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전태관, 이은미와 적우(그당시 무명이었지만 이은미와 함께 왔다)가 함께 했다. 뒤늦게 일정을 마치고 온 고 신해철도 합류했다.
노래 경연대회는 막내 격인 조PD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면서 시작됐다. 그당시 떠오르는 신예였던 조PD는 정말 깜짝 놀랄만한 노래실력으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 윤종신은 ‘고추 잠자리’, 김경호는 ‘모나리자’, 김종진은 ‘정’, 이현우는 ‘눈물의 파티’ 등을 잇달아 불렀다. 조용필의 노래를 후배가수들이 익히 알려진 음색으로 재해석해서 부르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아마 MBC <불후의 명곡>이 훗날 가요계에 두고두고 회자되던 ‘스타들의 방배동 조용필 노래부르기 경연대회’서 힌트를 얻어 제작되지 않았을까. 재미 있었던 것은 수백, 수천번 무대에 서봤을 가수들이 조용필 형 앞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는 표정이 신입사원 면접을 보는 듯했다는 것이다.
모든 참석자들의 노래가 한 순배 돈 뒤에 후배들은 조용필을 연호하며 답가를 청했다. 조용필은 술 한 잔 하면 자주 부르는 가곡 ‘떠나가는 배’를 불렀다. “훌륭한 가수입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98점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후배들은 ‘창밖의 여자’를 신청한 뒤 모두 바닥에 앉았다. 그의 절창은 끝도 없는 후배들의 앵콜 요청으로 조용필 콘서트 분위기로 이어졌다. 조용필 형은 가라오케에서 흥이 오르면 반주자를 자리에 앉아 술마시게 하고 직접 기타를 잡고 한 시간도 넘게 자신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날도 모처럼 후배들을 만나 ‘대한민국 최고의 노래방 콘서트’를 펼쳐보였다. 간간이 후배가수들이 게스트로 나와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날 모임은 새벽 4시까지 계속됐다.
그날 조용필이 40여 년 간 개척해온 길을 후배들이 넓히고 다져야 한다는 다짐을 끝으로 파했다. 지금도 그날 그 자리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인상깊은 모임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따로또같이 가수들이 만나는 자리야 있었겠지만 그날처럼 뜨거웠던 자리가 또 있을까. 그때도 10년이 흐른 지금도 가요계는 물론 세상살이는 여전히 팍팍하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힘든 서민들에게 노래는 여전히 위안이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로 위안받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가슴을 후벼파는 노랫말과 멜로디, 탁월한 보컬리스트의 유행가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요즘 가요계에서는 신곡이 나오면 길어야 2주면 끝난다는 푸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 형은 여전히 가요계의 좌장으로서 콘서트와 신곡발표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최근 허리수술로 몸이 예전같지 않지만 조용필 형은 방배동 자택에서 ‘고독과 악수’하면서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때로는 음악밖에 모르는 형의 인생이 좀더 다채로와지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형의 태도가 존경스럽다. 오늘날 대중가수가 딴따라를 넘어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된 이면에는 ‘조용필 형의 분투’가 있었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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