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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은 어디로 갔을까?

신승훈은 원래 ‘얼굴없는 가수’였다

 신승훈은 원래 ‘얼굴없는 가수’였다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가수 신승훈이 11집 <아이엠 앤 아이엠>의 수록곡 프리뷰 영상을 공개하면서 오랜 침묵에서 깨어났다.
 발라드 가수의 대명사가 된 신승훈이 원래 ‘얼굴없는 가수’였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90년 내놓은 첫앨범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KBS <가요톱 10>에서 5주 연속 1위로 골든컵을 차지하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또 데뷔앨범이 70여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데뷔와 함께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타가수로 발돋움했는데 얼굴없는 가수라니….
 신승훈은 대전의 다운타운가에서 노래하던 통기타 가수였다. 무명시절 그는 다운타운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팝송은 물론 가요에 이르기까지 800여곡의 레파토리를 준비할만큼 철저한 가수였다. 여성팬들에게 최적화된 목소리로 많은 ‘광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의 얼굴보다는 팝가수나 기존 가수보다 노래를 더 잘부르는 가수로 이름나 있었다. 

 그는 가수 데뷔를 위해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를 데모테이프로 만들어 서울의 기획사로 보냈다. 그러나 많은 기획사들이 그의 앨범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당시 그의 데모테이프에 관심을 보인 건 잘나가던 기획사가 아닌 어학전문테이프로르 만들어 납품하던 덕윤산업이라는 작은 업체였다. 이 회사에는 훗날 라인음향의 사장이 되어 대한민국 앨범 판매기록을 갈아치운 사맹석 사장이 제작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덕윤산업이 어학전문테이프 회사를 넘어 서서 음반제작에 손을 대기 위해 그를 영입한 터였다. 사이사는 70년대부터 가요제작자로 일해왔지만 그당시만 해도 특별한 히트곡이나 가수가 없이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암중모색’ 중이었다.
 그에게 DJ 출신 음악프로듀서인 김창환이 신승훈의 데모테이프를 가져왔다. 사이사는 첫곡인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듣고는 이내 신승훈의 매력적인 보이스 칼라와 작사·작곡 능력에 매료됐다. 당장 신승훈을 만나서 음반을 내기로 했다. 신승훈은 그동안 많은 기획사로부터 거절을 당해와서 가수의 꿈을 접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덕윤산업이 그리 넉넉한 회사가 아니었다. 어음을 돌려서 간신히 마련한 돈으로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사맹석 이사의 고민거리가 있었다. 대전에서 올라온 신승훈을 아무리 뜯어봐도 TV무대에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주얼이었다. 작은 키에 얼굴은 너무 커서 ‘화면발’이 안받을 게 뻔했다. 고민끝에 노래는 잘하니 얼굴없는 가수로 가기로 했다. 신승훈에게도 “너는 노래로 승부해야 하는 가수”이니 앨범 재킷에 사진을 넣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데뷔 앨범에 안경과 악보만 넣었을 뿐 어디에도 신승훈의 얼굴을 넣지 않았다.
 앨범을 각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돌린 뒤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빨랐다. 불과 한두달도 안돼서 소위 ‘길보드차트’(길거리 리어카 불법판매상을 그렇게 불렀다)에서 반응이 먼저 왔다. 방송에서도 “오랜만에 신선한 발라드 가수가 탄생했다”면서 매일매일 노래를 내보냈으며, 가요 프로그램마다  신청곡 엽서도 쇄도했다.

 라디오에서 반응이 오자 이번에는 TV 가요프로그램 PD들이 난리였다. 신인가수가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게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려웠는데 당장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없는 가수’ 신승훈은 방배동에 가서 급하게 양복을 맞춰입고 TV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며, 단숨에 KBS와 MBC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그렇게 선보인 신승훈의 앨범으로 사맹석, 김창환, 신승훈은 90년대 최고의 가수이자 프로듀서, 제작자로 성장했다. 물론 오랜 다운타운 경력이 있었지만 ‘대전촌놈(?)’ 신승훈이야말로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유해졌다'는 신화에 딱 어울리는 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