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신해철,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꿈꾸는 민물장어, 신해철
2009년 초겨울이었다. 형 저녁에 뭐해요? 술이나 한 잔 하시죠?
신해철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일을 마친 뒤 약속장소인 강남의 한 바로 갔다. 기자가 그것도 데스크가 서둘러 일을 마쳤지만 밤 9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이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신해철은 반갑게 나를 맞았다. 그무렵 신해철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당시 정말 많은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했지만 유독 신해철의 슬픔과 분노는 길고도 거칠었다.
그날 우리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기자생활동안 그를 인터뷰할 때마다 거칠지만 논리정연하게 솓아내는 말들을 정리하면서 그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익히 아는 터였다. 그날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우리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게 될 것이라면서 애석해 했다. 이야기할 때마다 신해철의 머리에 새겨진 뱀 문신이 꿈틀거렸다. 그날 신해철이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 요즘 작업 중이라는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만나자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가 만들어놨다는 신곡이 마치 레퀴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하릴없이 줄담배만 피웠고, 술잔을 들이켰다. 그나 나나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이제 건강관리 좀 하자고 서로 이야기했다.
“형 자주 만나요. 요즘 들어서 자꾸 옛날 사람들이 그리워져요. 맘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제일 좋더라구요.”
그날 헤어지면서 ‘나도 그렇다’고 맞장구 쳐놓고는 결국 바쁘다는 핑계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뒤로 몇 차례 통화하면서 ‘언제 술 한 잔 하자’는 지키지 못할 약속만 되풀이 했다.
그가 떠난지 1주년. 미디어에서 그를 추모하는 특집 프로그램도 나오고 관련기사도 나오면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때문에 괴로웠다. 그리고 술 한 잔 하자는 약속도 못지키고 허겁지겁 살아온 시간들이 후회됐다. 이미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신해철에 대해서 털어놓는게 뒤늦은 후회를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0년대초 무한궤도를 거쳐 넥스트를 결성한 신해철은 스타 중의 스타였다.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을 금지당했을 때도 그의 아우라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들은 80년대와는 또다른 무게감이 느껴지는 음악들이었다. 그는 감히 록으로 교향악을 만들고 싶어하는 야심가였다. 시적이면서도 도회적인 그의 노랫말은 대중가사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넥스트 멤버들과 빚어내는 멜로디와 리듬은 새로우면서도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가요계에서는 그가 지나치게 건방지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었다. 그 이유는 방송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거나, 선배들에게 깎듯하게 인사할 줄 모른다거나 하는 행위가 ‘제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기자였던 나에게 신해철은 필요할 때마다 전화해서 그의 도발적인 말들을 인용했다. 가요계는 물론 세상의 많은 문제에 대해 그는 논리정연하면서도 진보적인 태도로 입바른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전사’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미8군으로부터 공급받은 서양음악에서 탈피해야 돼요. 아직도 미국의 팝음악과 가장 근접하게 흉내내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대주의적 근성이 가요계 전반에 깔려있잖아요.”
그는 말로만 그렇게 떠드는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광주항쟁을 다룬 독립영화 <황무지>의 영화음악을 만든다거나, 치열한 로커들의 삶을 다룬 <정글스토리> 등의 영화음악에 참여했다. 물론 돈이 안되는 음악이었다. 그가 만든 노래 ‘70년대에 바침’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격방송,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보수락 연설 등을 담아 군사독재가 여전한 현재형임을 고발하고 있다. 99년에는 국악과 테크노를 접목시킨 실험적인 음악으로 한국적인 록음악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90년대 서태지와 댄스음악으로 상징되는 음악적 환경에서 그의 실험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목소리로 음악이 상업화 되는 시대에 저항했다. 언젠가 음악잡지에 실린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이땅에 신해철을 뛰어넘는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가수가 또 있을까 감탄한 적도 있었다. 신해철은 한 마디로 발상의 새로움, 끝없는 저항정신, 지칠 줄 모르는 정열, 꺾이지 않는 고집으로 똘똘 뭉친 ‘음악전사’였다.
그러나 또한편으로 신해철은 나약한 휴머니스트였다. 나 역시 그가 ‘건방진 가수’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만났지만 만남을 거듭할수록 사람에 대한 예의가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보여준 후배 뮤지션들에 대한 애정 역시 각별했다. 어려운 후배들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으며, 재능이 뛰어난 후배들을 이해서는 직접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가 가요계의 고질병들을 고치기 위해 퍼부은 ‘독설’의 뒤에는 진정성을 가지고 음악하는 후배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싶은 ‘깊은 애정’이 숨어있었다.
그가 ‘소셜테이너’로 불리면서 정치적인 회합이나 무대에 자주 섰던 건 그가 정치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신해철은 정치적인 이해타산을 따지는 소셜테이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구현하고 싶어하는 ‘민물장어’였다. 만약 그가 의도를 가진 소셜테이너였다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온 몸을 던져 지지했던 그의 공을 인정받아 문화부장관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바보 노무현’을 당당하게 지지하고 그를 사랑했던 한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 일에 헌신하면서 받게된 불이익에 대해 그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입’과 ‘노래’에 대해 대해 불편해하는 이들이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탄압했지만 그는 끝내 기사화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짧은 끌로 신해철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한 편으로 살아남은 우리가 그가 꿈꿨던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헌신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그의 1주기를 추도하는 자리에서 추모객들이 ‘민물장어의 꿈’을 합창했다고 한다. 비록 긴 여행도 채 끝내지 못하고 짧은 여행으로 생을 마감한 그를 위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소리쳐야겠다. 그가 꿈꾸던 ‘넥스트’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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