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꽃들이 속절없이 진다. 채 피지도 못하고 지는 봄꽃들이 안쓰럽다. 궂은 날씨 때문에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채 비바람에 스러져간 저 꽃들, 마치 서해 앞바다에서 황망히 생을 마감한 청춘들을 닮았다. 무릇 꽃은 4월의 햇살 속에서 환하게 피어나, 봄꽃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꽃다울 터인데…. 올 봄 피어난 꽃들은 시절을 잘못 만난 탓에 꽃다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봄날의 인간사 또한 그러해서 저 남쪽 끝에서부터 발화해야 할 봄꽃축제가 하나둘 취소되더니 북쪽 끝까지 매양 비슷한 풍경이다. 4월의 시인 신동엽은 이렇게 노래했다.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이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하다커니 // 눈이 휘둥그레진 수소문에 의하면 / 봄은 먼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惡漢)한테 몽둥이 맞고 /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봄의 소식’ 중에서)
‘기시감(旣視感)’이란 단어가 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면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의식(意識)’을 일컫는다. 불어의 ‘데자뷰(Deja Vu)’와 같은 의미다. 신동엽의 시를 읽으면서 기시감이 느껴진 것은 왜일까.
천안함•4대강•정치검찰…
요즘 만나는 이마다 예전에 잘 들어보지 못한 단어들의 잦은 출몰을 많이 우려한다. 지하벙커, 선제타격, 북풍, 전쟁, 간첩단, 북한=주적, 환수조치, 정치검찰, 경찰의 선거개입 논란, 종교계 기도회 등. 매일 쏟아지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보면서 내가 혹 타임머신을 타고, 지난 시대 어디쯤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의심해볼 때가 많다.
시국을 해결하는 정권의 방식 또한 그렇다. 천안함 사건 이후 “최종 물증이 나올 때까지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두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로 불렀다.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은 “천안함 사고는 100% 북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다.
그뿐인가. 대통령의 오른팔로 알려진 류우익 주중 대사도 “천안함은 공격당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천안함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각계의 전문가들이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이분들은 전문가들의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이번 사고를 북의 소행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리하여 처절한 복수극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만약 북의 소행이었다고 치자. 우리가 철통같이 지키는 영해 한가운데까지 북의 잠수함이 귀신도 모르게 접근하여 어뢰를 쏘고 도망갔다고 가정하자. 그럼에도 사고 발생 한 달이 다 돼가도록 이를 규명하지 못했다면?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아니, 국군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불안하다.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어귀마다 이 땅의 신부와 수녀, 목사와 교목, 스님과 시인들이 파헤쳐진 강을 속절없이 바라보며 가슴아파 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검찰의 오명을 쓴 검사들의 ‘검사스러운 술자리’를 보면서 분노한다. 그뿐인가. 스님들마저 좌파 운운하며 편을 갈랐던 한 정치인은 천안함 뒤에 숨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다가올 지방선거의 공천 잡음과 이전투구, 정치인들의 어지러운 말잔치도 지켜봐야 한다. 반성 없이 소통을 거부하는 정부를 보면서 답답한 4월을 보내고 있다.
반성 모르는 정부…민심은 불안
‘껍데기는 가라. /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수십년 전 시인 신동엽이 쓴 시가 날것 그대로 온 몸으로 느껴진 것도 혹 기시감일까.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과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흘려온 피와 눈물이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우리의 미래인 자식들에게 또다시 그 고통을 전가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더 이상 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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