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오월이 간다. 아니 가슴 서늘한 오월, 괜스레 피가 뜨거워지는 오월이 간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프랑스 샹송가수 미쉘 뽈라레프가 부른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Qui A Tue Grand Maman)’를 듣는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진 감미로운 목소리가 온 몸을 감싼다. 음표들이 오월의 아카시아향처럼 피어나고, 기억의 세포들이 일제히 기립한다.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에/ 정원엔 꽃들이 만발했지/ 이제 그 시절은 가고 남은 거라고는 기억 뿐/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세월인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인가?’
80년대 중반의 오월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 노래는 몰라도 선율은 뚜렷이 기억할 것이다. 당시 이 노래는 누군가에 의해 ‘오월의 노래’로 번안되어 불렸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흩어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왜 찔렀지. 왜 쏘았지/트럭에 실려 어딜갔지.’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장에서 정부가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을 선곡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이 노래가 떠올랐다. 그리고 역사 저 편, 뜨거웠던 오월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꽃잎처럼 흩어진 너의 붉은피
대학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행진한다. 여기저기서 최루탄이 터지면서 중무장한 백골단이 대오를 향해 내닫는다. 백골단의 곤봉이 사정없이 여학생들을 내리치고, 한쪽에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펼쳐진다.
오월, 그들이 원했던 건 정의였고, 자유였다. 그리고 민주주의였다. 거기엔 그 어떤 계산도, 그 어떤 회의도 없었다. 80년대 중반, 오월의 한가운데. 최루탄 자욱한 광주 충장로에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버티던 청년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온전하게 사는 게 부끄럽던 시절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구치소와 최전방으로 면회를 갔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하던 학우를 보면서 눈물도 흘렸다.
그리고 오늘, 당시의 대학생과 청년들은 그 무엇이 되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됐다. 국회의원도 되고, 교수도 되고, 시장도 됐다. 누군가는 청와대에 들어갔고, 또 누군가는 벤처사업으로 큰 돈도 벌었다고 했다. 머리가 희끗해진 그들에겐 정의보다는 빵이 중요해 보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도 오월은 여전히 뜨거웠다. 촛불이 타던 2008년, 노란 리본이 뒤덮였던 2009년. 오월의 시청앞 광장은 마치 누군가가 연출이라도 하듯이 뜨거운 가슴들로 붐볐다. 촛불이 타오르고, 노란 리본이 뒤덮인 현장에서 나는 적어도 이 나라 민주주의는 앞으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마다 촛불을 들고 나와서 소통할 줄 모르는 대통령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는가. 권력의 달콤함을 국민앞에 내려놓고 스러진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
역사는 2010년 오월을 어떻게 기록할까. TV화면에 별을 주렁주렁 단 군인들이 자주 등장하고, 스님과 신부들이 다시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오월이었다. 유언비어, 친북좌파, 전쟁국면 등 선동적인 단어들도 재등장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통일의 기치는 천안함의 침몰과 함께 날아가고, 좌우를 갈라 밥그릇을 빼앗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주적 개념을 부활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국민들이 안이해졌다며 질타한다. 남북관계는 지난 십수년을 통틀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경색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한반도는 이데올로기 대신 자본전쟁을 위해 무장한 미국과 중국의 씨름판이 되고 있다.
누가 통일의 열망을 앗아갔나
누가 민주주의를 죽였나. 누가 통일을 향한 열망을 송두리째 앗아갔나. ‘세월인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인가?’ 오월의 신록 아래서 아름다운 청춘의 한때를 포기하고, 당당하게 부당한 권력과 맞서며 빵보다는 자유를 갈구했던 수많은 이들. 그 많은 이들이 흘린 ‘붉은 피’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끝날까 두렵다.
아니, 우리 아이들이 또다시 갈등과 반목을 세습하며 살아가는 걸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그네들이 다시 오월의 광장으로 모이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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