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국밥집에서 TV뉴스를 보다가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따끈한 국밥 앞에서 도저히 숟가락을 뜰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아이티 대지진의 현장에서 리포터가 한 소녀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구출된 11살난 소녀가 “엄마, 죽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숨을 거뒀다는…. ‘살찐 소파’처럼 부푼 내 몸이, 기아문제에 무관심했던 내 이기심이 한꺼번에 부끄러워졌다.
그랬다. 대지진 전까지 나에게 아이티는 상반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카리브해의 뜨거운 열정을 담은 그네들의 리듬, 강렬한 삼원색의 색채가 인상적인 아이티 무명 화가의 그림들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반면 원색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도 또렷하다. 몇 년 전 읽은 일본의 소설가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책 <토토의 눈물>에는 슬픈 대목이 나온다. 아이티에서 성매매에 나선 12살 소녀에게 작가가 물었다. “에이즈가 무섭지 않니?” “차라리 에이즈에 걸리는 게 나아요. 에이즈에 걸려도 몇 년은 산다잖아요. 우리 식구는 당장 내일 먹을 게 없어요.” 그 소녀는 매춘을 한 번 할 때마다 6굴드(400원)를 받고 있었다고 작가는 전했다. 또 하나의 충격은 아이티 사람들이 먹는다는 ‘진흙쿠키’-쿠키라는 표현이 거슬리지만-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AP연합뉴스 제공)
미국의 흔적 새겨진 슬픈 현대사
아이티의 역사를 한국의 근·현대사에 투영해 보면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다. 206년 전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의 투쟁으로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하여 20년간 통치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배후 조종자로 남아있다. 세계적인 석학 노엄 촘스키는 “미국의 침공은 극단적인 인종주의로 점철된 추악한 전쟁”이라고 비판하면서 “앞으로 수십년간 (아이티는) 살기 어려운 땅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70년대 초부터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쿠바에 대항하기 위해 아이티의 독재정권인 뒤발리에 부자를 지원해왔다. 그 사이 뒤발리에 정권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각종 개발을 남발하면서 사익을 챙겼다. 결국 잘못된 국토 개발과 농업정책의 실패로 인해 도시빈민이 늘어나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이후 미국은 민주정부의 수립과 군사쿠데타가 거듭되는 아이티를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자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해왔다. 아이티의 대지진이 ‘천재’가 아닌 ‘인재’인 이유다.
아이티의 슬픈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한국 근·현대사에 개입한 미국의 흔적들이 떠오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일본의 식민통치, 해방과 한국전쟁, 독재정권의 광주학살 만행 등 역사의 고비마다 미국이 있었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아이티와 달리 특유의 역동성을 앞세워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수혜국’에서 ‘지원국’이 됐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만났던 한 저널리즘 교수가 “한국은 (뉴스가 많아) 신문 만들기 좋은 나라”라고 하기에 “그래서 한국의 오늘이 있다”고 맞받아쳤던 기억이 있다.
그랬다. 우리는 버릇처럼 모두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해왔다. 온 국민이 모두 정치평론가이자 경제전문가다. 한 가족을 이끌다보니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늘어났다. 환경문제가 불거지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가 어떤 모습일까 걱정하고, 교육문제가 불거지면 내 아이가 불편해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또 4대강이니 행정도시니 하는 문제도 기실 나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해 고민하게 된다. 최근 겪은 글로벌 경제위기 때마다 치열하지 않으면 굶을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래서 더 전투의지가 불타오른다.
아름다운 풍광 다시 볼수 있기를
요즘 걱정되는 건 이러한 역동성이 현 정권의 일방주의에 희생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다. 머리 터지게 싸우면서도 슬기롭게 결론을 도출해온 저력이 희석될까 두렵다. 우리의 미래가 몇몇 일방주의자들에 의해 결정되면 안된다. 당장은 아이티 소녀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급선무다. 아이티의 무명 화가가 다시 붓을 잡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티를 위해 1억원을 쾌척하는 김연아가 있는 나라다. 더 많은 김연아를 만들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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