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망할 놈의 TV

지지고, 볶고, 노래하고. 추석연휴 ‘딴나라TV’

 

 

 

        70년대 추석귀향 열차표를 구하려는 시민들. 경향신문 사진부

 

 

 지지고, 볶고, 노래하고. 추석연휴 ‘딴나라TV’

 
 추석명절이 지났다. 추석은 늘 풍성함의 상징이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온 들판에 오곡백과가 익어갈 무렵이면 적어도 먹거리 때문에 인심 사나워지는 일이 없는 시기가 추석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추석은 예전같은 풍성함이 없다. 올해 추석명절의 화두가 ‘먹고 살기 힘들다’, ‘이대로 가다가 나라가 거덜나겠다’였다니 그리 행복한 명절은 아니었다.
 70년대 시골마을의 추석은 서울 갔던 동네 총각 처녀들이 내려와서 한 바탕 홍역을 치루던 시기였다. 별로 배운 게 없이 도회지로 일하러 떠났던 시골동네 처녀, 총각들의 서울살이는 뻔했다. 여자들은 구로공단이나 청계천에서 봉제공으로 일했고, 총각들은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는게 보편적이었다. 70년대 신문 사회면 톱기사를 보면 ‘공단마다 선심만발, 구인난 시대의 새지혜’나 ‘공단마다 종업원 지키기 안간힘, 전세버스 내서 집단 귀사 선심’등의 제목이 보인다. 두둑한 보너스를 받고 금의환향한 도시물 먹은 시골 총각과 처녀들은 추석 명절에 고향동네 남아있던 친구들을 설득해서 서울로 갔다. 또 서울에 취직해 있던 총각과 처녀도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직장을 찾아 이직하는 시기가 바로 추석 때였다. 어쩌다가 서울에서 사장님이 되어 돈 좀 벌어서 출세한 고향사람이 자가용이라도 끌고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술렁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울로 갔던 처녀, 총각들이 고향마을에 와서 눈이 맞기도 했다. 추석이라고 한껏 부푼 마음에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게 되면 남녀상열지사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다시만나 솥단지 걸어놓고 살림을 차린 커플도 많았다. 전태일이 분신했던 우리의 70년대에 밤샘하면서 미싱을 돌리던 우리의 누이들과, 밤잠도 안자고 주물공장이나 막노동으로 지쳤던 형들에게 추석은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으리라.
 요즘 추석에는 구직을 포기한 20대들이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서 PC방을 전전한다는 기사를 보면서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이 모여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언제 취직할 거냐?”,“왜 결혼을 안하냐?”고 물어오는데 조상님한테 차례를 지낼 기분이 나겠는가.
 여하튼 우울한 얘기들 뿐인 추석에 시골집을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TV를 자주 보게됐다. 그런데 TV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딴나라 TV가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냥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노래하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듯했다. 채널을 돌리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지지고, 볶고, 끓이면서 맛대결을 벌인다. 대한민국에 웬 쉐프들이 이렇게 많은 지, 또 요리 잘하는 명사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또 한편에서는 노래경연이 한창이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대한민국에 노래 잘하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지상파는 물론 케이블이나 종편에 이르기까지 먹고 마시고 노는 프로그램으로 도배를 해댄다. 그 사이에 낀 케이블 홈쇼핑에서는 먹고 노는데 필요한 상품들을 팔기 위해 또 지지고 볶는다.어떤 프로그램은 유명인들이 나와서 클럽에 갈때 적당한 패션을 선보이고 심사위원단이 이를 평가하기도 한다.  

 TV만 보고 있으면 이렇게 행복한 나라가 없다. 한 끼를 먹어도 맛없는 걸 먹는 건 치욕이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품위있게 마시는 법이 따로 있다. 한식은 물론 프랑스요리, 이태리요리, 아시안푸드까지 다양한 먹거리들의 레시피가 넘쳐난다. 온 한 벌을 입어도 때와 장소에 맞는 명품을 걸치라고 부추긴다. 이땅의 프랜차이즈 시장을 석권한 사장이 전국민의 스타로 떠오르고, 한의사부터 개그맨까지 조리대 앞에서 비장의 레시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청소년 다섯명 중 한 명이 가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세태를 반영하듯 가요예능 프로그램도 허다하다. 복면을 두르고 노래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본토인 미국의 힙합스타 뺨칠만한 실력을 가진 젊은 아티스트들이 치열한 경합을 펼친다. 지난 10여년간 이땅의 노래방 문화가 전 국민의 노래실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게 분명하다. 대한민국에서 일등하면 세계 시장에서도 분명 일등할 수 있을 것 같다.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이야말로 태평성대가 아닐 수 없다. 요순시절에도 이랬을까.
 그런데 왜 TV밖으로 나오면 작금의 삶은 이다지도 힘든 것인가. 추석만 지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독거노인들이 늘어나고, 구직을 포기한 청년실업자가 한강다리 위로 올라가는가. 시청료와 광고료로 먹고사는 미디어가 좀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취직 안된 아들과 딸에게 용돈을 쥐어줘야 하는 처지에 곧 다가올 정년을 앞두고 한 숨이 깊어지는 내 친구들과 이웃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지고 볶고 끓이면서 맛있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걸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전국민의 가수화도 집어 치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