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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빵도 안되는 시

무미건조한 도시?, 서울의 시(詩)

 

 

 

 무미건조한 도시?, 서울의 시(詩)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시인 김수영이 걸어나왔을 창경궁. 경향신문 사진부 

 

 

 

 따지고 보면 서울은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아니다. 무릇 도시에서의 삶이란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와 같아서 그 공간에서 시를 건져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시와 달리 대중음악은 서울 곳곳의 아이콘이 될만한 노래들이 꽤 있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나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라는 노래에서부터 혜화동에 가면 역시 동물원의 ‘혜화동’이 있다. 패티김도 ‘서울의 찬가’를 불렀고, 조용필도 ‘서울 서울 서울’을 노래했다. 왕년에 정수라는 종로에 사과나무를 심고, 을지로에 감나무를 심자고 주장한 ‘아 대한민국’도 불렀다.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 역시 한강을 건널때면 가끔 떠오르는 노래다.
 그래도 시인들이 쓴 서울소재 혹은 서울의 어디쯤 가면 생각나는 시가 없는 게 아니다. 지금은 연극인들의 거리가 된 혜화동이 왕년에는 젊음과 낭만이 넘치던 거리였던 모양이다. 김광규 시인의 ‘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보자
 ‘4·19가 나던 해 세밑 /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였다 /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 (중략) /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하략)’
 청년시절 젊음과 열정의 거리였던 혜화동 로터리가 중년이 된 시인에게 일상에 허우적거리는 동숭동으로 돌아온다. 혜화동 윗동네 성북동으로 가면 김광섭 시인이 있다. 교과서에도 나왔던 ‘성북동 비둘기’가 그것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 가슴에 금이 갔다. /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사대문 안에 있는 고궁들을 지날때면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가 떠오른다. 그런데 수십년전 쓰여진 시가 여전히 현재형이다. 갈수록 그의 시에서 절절함이 묻어나오는 건 우리네 삶이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 옹졸하게 욕을 하고 // 한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 너어스들 옆에서 //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 정말 얼마큼 작으냐…….’
 한때 시를 읽고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한달음에 가본 동네도 있었다. 오규원 시인의 ‘개봉동과 장미’에 빠져 가봤던 개봉동은 정말 을씨년스러웠다.
 ‘개봉동 입구의 길은 /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 말해 보라 /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세대 시인들의 시가 사대문 안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면 시인 유하는 세운상가에서 시작하여 강을 건너 압구정동에 이른다.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라는 까페가 생겼다 / 온통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 그 옆은 뭐, 매춘의 나영희가 경영한대나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 충돌……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여 펜트하우스를 팔러 다니던, / 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 / 교환하던 녀석, 배나무숲 너머 산등성이 그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 / 피식, 벌거벗은 금발 미녀의 꿀배 같은 유방 그 움푹 파인 배꼽 배…. / 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가 / 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 (하략)’

 당대의 시인 함민복은 서울을 정면에서 비판한다.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에서 그는 ‘가로수가 더이상 전원에 부착된 / 안전벨트로 보이지 않는 도시 / 서울의 클리토리스 남산 / 거대한 주사기처럼 스포이트처럼 / 발광하며 문명을 주사하는 타워’라고 노래하는가 하면 ‘정서의 겉절이 시대 / 적당량의 희망과 고통과 죽음을 투여받아 / 전신이 무감각화된 서울’이라고 비판한다.
 보들레르는 그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서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라고 노래했다. 테러로 쑥대밭이 된 파리를 생각하면서 수많은 시와 노래가 떠오르자 마음 한 편이 저리다. 서울이라는 이름에 좀더 많은 노래와 시가 얹혀진다면 ‘그래도 살만한 서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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