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 빵도 안되는 시 썸네일형 리스트형 슬로슬로우 퀴퀵 - 오광수 어느 가을날 지리산 등성 어디쯤서 반달곰과 딱 눈이 맞는다면 마늘 몇 쪽 갖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녀석과 살림 차려야지. 그 계곡 어디쯤서 날다람쥐 한 마리 만난다면 쳇바퀴 굴리듯 한세상 돌고 돌아야지. 가을 햇볕에 천천히 가슴을 데우다가 마침내 비등점에 오르면 붉게 붉게 타올라야지. 붉은 마음이 식어 하얀 재로 남으면 팔랑거리며 눈이 되어 내려야지. 사람도 한 그루 나무인 그 산에서 네 편 내 편도 없이 한세상 환하게 살아야지. 어느 날 또 내가 마침내 죽음과 눈이 딱 맞는다면 슬로슬로우 퀴퀵 춤을 춰야지. 반달곰 가슴을 팍팍 치면서 나 없어도 잘 살아 얘기해야지 도토리 점심을 주면서 다람쥐한테도 안녕 해야지. 사는 일이 슬로슬로우 퀴퀵이라고 계곡물에게도 알려줘야지. 모두들, 서두를 것 없이.. 더보기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오광수. 좀 나이 먹고 가요에 대해 관심있는 독자라면 친숙한 이름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삶의 대부분을 문화부 전문기자로 지내면서 경향신문을 통해 오랜 세월 독자들과 교감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대중들과의 소통이 원활한 신문기자라서 그 이름 석자가 알려진 것만도 아니다. 그는 기자가 되기 전에 시인이었다. 그것도 지난 1986년 동인지 ‘대중시’로 데뷔한 중견시인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월간 ‘시인동네’가 발굴시인 특집으로 오광수를 소개하기도 했다. 30년 넘는 세월을 기자와 시인으로 번갈아 살아온 그가 시인으로서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라는 표제의 시집을 내놨다. 출판사 ‘애지’의 여든한번째 시집이다. 그의 첫 시집이기도 하다. 표제만 보면 언뜻 파릇파릇한 스무살 청춘의 심장을.. 더보기 결혼식 축시의 어떤 예 결혼식 축시의 어떤 예 이렇게 좋은 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가을 하늘을 떠돌던 두 개의 별이 만나 초저녁 달빛 사이로 빛나는 이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참 먼 길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개나리는 수 없이 피고 지고, 단풍잎은 또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요 몇 천의 붉을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는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시작된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는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렇게 진득한 사랑을 시작했으니 모닥불처럼 타오르다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폭풍우처럼 밀려와 나무를 뽑는 그런 사랑 말고 시골집 안방에 놓인 화로처럼 은근하고도 뜨거운 사랑 막 쪄낸 콩고물에 무친 인절미처럼 쫀득한 사랑 오늘.. 더보기 가을은 늙지 않는다 가을은 늙지 않는다 오광수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가을저녁 마음을 다쳐 끝내 몸살이다까치밥으로 남은 홍시 하나늑골 근처서 달랑거리다 툭,온몸 적시며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가을은 하필 늙지도 않고 찾아와서 내 낡은 관절을 쑤시며 콕,첫사랑을 배신한 죄를 묻는가 모과향 나던 젖가슴을 가진 여자가마른 기침으로 찾아온 새벽거봐라 하며 지나가던 가을이아직 푸른 처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콱,붉디 붉은 단풍들로 숨이 막힌다 절정에 오른 나무들이 얼굴 붉히며 흰눈 같은 혁명을 기다리는 새벽늙지도 않는 가을 때문에 마음 다친 사내가 폭설에 갇혀 길을 잃는다 젊은 가을 때문에 사무치면 지는 거라고비루한 몸들이 소리치지만 속 빨간 단풍을 어찌할 수 없다어느새 흰눈이 머리를 덮고 첫사랑의 화인(火印)도 천천히 지워진다. 더보기 호박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호박 오광수 밥솥에서 쪄 낸 호박잎에 보리밥을 올리고 강된장 한 숟가락 척 얹어서 입에 넣는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혀끝에 머물더니 사박사박 씹히면서 목넘김이 부드럽다. 전해오는 식감을 따라 마음밭은 한달음에 고향집 뒤꼍 장독대까지 내닫는다. 할머니가 심은 호박씨에 할아버지가 똥지게 몇 번 져 나르면 씩씩한 호박순들이 투덜거리며 올라왔다. 그땐 몰랐다. 냄새 나는 똥 속에서 뒹굴어야 새순이 돋고 열매가 맺힌다는 걸. 벌들이 아양 떨면서 노란 호박잎에 입맞춤하면 잘생긴 애호박 하나 뚝딱 만들어졌다. 호박잎 사이 숨바꼭질 하면서 용케도 살아남은 호박들은 노랗고 탐스런 호박으로 늙었다. 나중에 알았다. 별 일 없이 늙어간다는 게 호박에게도 쉽지 않다는 걸.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가 탐스런 .. 더보기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시인) 지리산 노고단. 경향신문 사진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천왕봉 일출을 보러오시라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흑심을 품지 않는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오려거든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더보기 다시 겨울공화국에서 다시 겨울공화국에서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2 활활타고 있는 연탄.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네가 있는 태평양 한 가운데 나라는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씨겠구나. 여름바다는 늘 젊음의 기운으로 뜨겁지. 늘 사람들로 넘쳐나고 파도는 그 기운을 받아 더욱 거침없이 몰아치면서 싱싱한 근육들을 자랑하겠지. 예전에 캘리포니아 앞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청춘들을 보면서 한 없이 부러웠던게 생각나는구나. 서울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겨울바다라도 가고 싶지만 충동적으로 바다로 달려가던 혈기가 나에게서 떠나갔는지 마음만 있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구나. 안타깝게도 철이 든 건지도 모르지만. 청춘의 한 시절 술 한 잔 하다가 충동적으로 부산행 심야기차에 몸을 싣고 광안리와 해운대까지 내달렸던 시절도 .. 더보기 무미건조한 도시?, 서울의 시(詩) 무미건조한 도시?, 서울의 시(詩)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시인 김수영이 걸어나왔을 창경궁. 경향신문 사진부 따지고 보면 서울은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아니다. 무릇 도시에서의 삶이란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와 같아서 그 공간에서 시를 건져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시와 달리 대중음악은 서울 곳곳의 아이콘이 될만한 노래들이 꽤 있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나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라는 노래에서부터 혜화동에 가면 역시 동물원의 ‘혜화동’이 있다. 패티김도 ‘서울의 찬가’를 불렀고, 조용필도 ‘서울 서울 서울’을 노래했다. 왕년에 정수라는 종로에 사과나무를 심고, 을지로에 감나무를 심자고 주장한 ‘아 대한민국’도 불렀다.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 역시 한강을 건널때면 가끔 떠오르.. 더보기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딸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저 켠에 환한 등불이 켜지는 딸아. 어느덧 십일월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에 젊은 친구들은 할로윈축제로 시끌벅쩍 했다는데 대략 인생의 가을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빠는 쓸쓸함이 절반이었다. 그래서 한 잔 했다. 다시 못올 것들을 호명하면서 말이다. 요즘 시집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지? 지내놓고 보니 시(詩)는 마치 첫사랑 같은 것이더구나. 기쁠 때나 슬플 때,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 꽃이 지고 황혼이 걸릴 때 문득문득 떠올라 목울대에 걸리는…. 그때마다 울컥하고, 요즘말로 ‘심쿵’하는 게 시였다. 네가 젊음의 한때 그런 시를 마음 속에 담아두는 건 첫사랑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지. 함민복이라고, 아빠가 아는 .. 더보기 가을에 흔들리지 않는다구요? 가을 저녁寺 박정대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나는 걸어서 가을저녁寺에 당도합니다 한 사내가 물거울에 자신의 낯을 비추어보며 추억을 빨래하 고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잉걸불처럼 타들어가는 개심사 배롱낭구 꽃잎에는 어느 먼 옛날 백제 처녀의 마음도 하나 들어 있을 테지요 저녁 예불을 드리던 개심사 범종 소리는 서른두 번째에서 한 참을 머뭇거립니다 마지막 종소리는 가을 저녁寺로 불어오는 바람에게나 내어주고요 가을 저녁寺에 호롱불이 돋는 地上의 유일한 저녁입니다 한 사내가 연못거울에 어두워지는 낯을 비추어보며 끝내 자 신이 걸어가 당도할 집을 생각하는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 저녁입니다 나는 걸어서 가을 저녁寺를 내려옵니다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세상 참 고요합니다. 가을저녁寺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 더보기 해녀 해녀 바다와 남자는 돌아서면 늘 그립다 베개 당겨 돌아눕는 밤이면 자궁 가득 달덩이처럼 부풀어오르는 미치도록 뜨거운 그리움, 그리움에 물들어 파도는 저리 조용하고 하현달 맑은 빛 해살대는 바다 위로 가슴 맑은 사내가 억센 팔뚝 드러내고 첨벙거리며 다가온다. 빈 소라껍질이거나 뒤엉킨 해초 같기도 한 풍진 같은 세월을 파도의 물결에 쓸어버리고 다시 길 나서는 새벽. 지난밤 그리움이 바다를 뒤덮으며 붉디붉게 살아오르고 몸 하나 믿고 사는 착한 해녀가 뜨거워진 파도 위로 몸을 던진다. 오광수 더보기 마른 풀들에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마른 풀들에게 1 일찍이 내가 추위 가득한 벌판의 한 구석에서 나무 십자가로 서 있을 때 너희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과의 싸움에서 너희들의 입술은 말라 터지고 마지막 푸른 피 한 방울까지도 흘려 버렸지만 난 부끄러운 알몸조차 가리지 못한 채 윙윙 울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지나면 너희들의 마른 기침은 어둠과 함께 깊어가지만 우리들 사랑의 목마름을 위해서 무수한 바람의 칼날 앞에서도 피흘리며, 피 흘리며 다시 일어나는 의지로 우리들 삶이 갈증과 갈증의 화답이란 것을 깨닫게 한 마른 풀들이여 2 만약 너와 내가 우리들 적인 바람과 눈보라가 잠잠해 고통없이 살 수 있다 하면 우리는 이미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할 뿐 적막한 지상에 마른 그림자 하나 남기지 못.. 더보기 초승달 아래 초승달 아래 전동균 경향신문 사진부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 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그락거 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시인사) 드라마로 유명해진 강릉 정동진 근처에 `등명(燈明)'이 있단다. 해수욕장도 있고 바다도 있다 했다. 어쩌면 그냥 시 속의 잔상으로 남겨놔야 더 아름다울 것 같은 어촌마을. 지치고 피곤할때 등명의.. 더보기 꿈 마르크 샤갈 / 도시 위에서 꿈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총천연색 영화관 호러에서 멜로까지, 액션에서 에로까지 빨주노초파남보 필름보관소 오광수 더보기 화전민의 꿈 강원도 정선 화전민이 떠난 폐가. 경향신문 사진부 火田民의 꿈 1 우리들 삶은 부질없이 부는 바람과 같아 어느 땅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어느 하늘에서도 잠들지 못한다 가없이 넓은 하늘과 땅이 있지만 우리가 머물 곳은 아무 데도 없고 바람이 불을 일으켜 땅을 만들면 그 땅을 일구어 자식들을 길들이고 아침마다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와 흰 서리의 섬뜩한 촉감을 사랑하며 또 하나의 집을 허물 뿐이다 2 서러워 말아라 머리를 두고 눕는 곳이면 어디나 고향이고 너희가 불로 다스릴 수 있는 모든 땅들이 너희들 것이니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지 말고 무리지어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 말아라 그들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안개와 바람과 숲을 기억하지 못하고 지상의 모든 꿈들을 하나 둘 잊어버리며 잊은 것만큼 죽어가고 있으니 3 .. 더보기 선창술집 충남 서천 마량포구. 경향신문 사진부 선창 술집 김명수 앵미리 굽는 연기가 술집 안에 자욱하다 오징엇배를 탔던 사내 장화를 신은 채 목로에 들어와 소주를 마신다 주모는 술손님과 너나들이로 스스럼이 없다 남편도 옛날에 오징엇배를 탔다 한다 사내들이 주모에게 소주잔을 건네고 주모가 서슴없이 술잔을 받는다 진눈깨비 몰아치고 날씨가 사납다 술청 안에 욕설이 뒤섞이고 멱살잡이가 벌어진다 자정이 넘어서야 술집 불이 꺼지고 비틀대며 사내들이 선술집을 나선다 동이 트자 환한 해가 술청으로 쏟아진다 어느새 주모가 선창으로 나선다 안줏감을 흥정하는 그녀의 얼굴에 싱싱한 아침해가 환하게 빛난다 -계간 `사람의 문학' 여름호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나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를 읽다보면 이땅의 어머니들.. 더보기 아직도 강남엔 제비가 있을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제비를 기다리며 문정희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 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계간 `.. 더보기 한 사내, 조영남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한 사내 -가수 조영남 화개장터에서 소쿠리장사나 하지 소쿠리 가득 충청도 삽다리 인심 담아서 덤으로 복조리까지 얹어주는 뚝심좋은 소쿠리 장수나 하지 검은테 안경만 벗으면 시골집 안방에서 구수하게 띄운 메주 한덩이처럼 어영차 영차 구렁이 담넘듯 세상 살아갈 사내 화투장 잘게 잘라 만든 당신 그림처럼 삼팔광땡, 삼팔따라지 같은 세상에서 소주잔 기울이다 포장마차 나오면 문득 한여자가 그리워지는 늙은 청춘의 새벽 등짐 하나 메고 훌훌 떠나서 한강 건너 삽다리 지나 화개장터 어디쯤, 섬진강 어귀 어디쯤 가끔은 눈물도 보이고 바람 만져 보면서 살아보고 싶은 그대는 지금 서울이라는 쇼무대 위에 서 있지 오광수 더보기 우리도 꽃처럼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우리도 꽃처럼 우리도 꽃처럼 피고 질 수 있을까 길고 긴 인생 길, 피고지며 살 수는 없나 한번은 라일락이었다가, 이름없는 풀꽃이었다가 가끔은 달맞이 꽃이면 어떨까 한겨울에도 눈꽃으로 피어 동짓날 밤, 시린 달빛과 어우러져 밤새 뒹굴면 안될까. 맹렬하게 불타오를 땐 아무도 모르지 한번 지면 다시는 피어날수 없다는걸 뚝뚝 꺾여서 붉게 흩어지는 동백꽃잎 선홍빛처럼 처연한 낙화의 시절에 반쯤 시든 꽃, 한창인 꽃이 그립고 어지러웠던 청춘의 한 때가 그립네 막 피어난 백목련, 환하기도해라 그 그늘 아래로 조심스레 한발씩 저승꽃 피기전, 한번쯤 더 피어나서 궁상각치우로 고백할 수 있을까 봄바람 가득한 꽃들의 가슴에 사랑한다고 저릿한 고백 할 수 있을까 단 한 번 피었다가 지는 사람꽃 오광수 더보기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때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권혁웅/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 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 더보기 운주사 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운주사(雲住寺) /시바타 산키치/ 붉게 익은 고추가 바람에 흔들리는 눈이 닿는 한 끝없이 펼쳐진 고추밭은 석양에 불타는 구름 같다 운주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바람에 이끌려 드문드문 비치는 사람 그림자와 함께 간다 천의 탑, 천의 돌부처가 이 들판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햇빛 아래, 부처의 등이 깨어지고 얼굴은 잘려서 떨어져 나가 풀숲에 잠들어 있다 9층이었던 석탑도 7층으로 하늘이 무너뜨린 것인가 사람이 무너뜨린 것인가 기단에 걸터앉아 광주에서 온 노인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이것도 부처님, 저것도 부처님입니다” 사방에 흩어진 돌조각들을 가리키며 오래된 일본어를 기억해내면서 가르쳐 준다 이것도 부처님? 밟고 왔던 풀 속에서 돌조각을 하나 줍는다 이제 상처는 치유되었을까 안으로부터 마멸된.. 더보기 그냥 사진 오광수 그냥 오광수 봄꽃이란 봄꽃 모조리 다 피었을때 우리네 생도 모조리 피었으면 좋겠네 그늘 속 숨죽이던 이끼들까지 연파랑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네 산수유는 이미 노랗고, 개나리는 저리도 환한데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울어버릴듯 고개 떨구고 지나가는 당신 목련꽃 그늘 아래서 입맞춤하던 그 순간 눈 앞을 뒤덮던 황홀한 꽃비는 사라지고 추억하기엔 너무 잔인한 오월의 하루 시나브로 청춘은 시들어 이제는 꽃 진 자리 송홧가루가 버드나무 솜털 사이로 흩날릴 때 푸른 소나무 사이로 하염없이 걸어가던 당신 어디쯤 맨발로 걷고 계시는지요 다시 시작한다면 그 어디쯤서 그냥 이름없는 야생초로 피어나고 싶다네 봄꽃이란 봄꽃 모조리 다 질 때 우리네 생도 그냥 저물었으면 좋겠네 노여움도 서러움도 없이 가는 봄이 아쉽지 않.. 더보기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좋은 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기어이 올 줄 알았습니다 가을하늘을 떠돌던 두 개의 별이 만나 / 초저녁 환한 달빛 아래 빛나는 이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참 먼 길 돌아왔습니다 / 그 사이 개나리는 피고지고, 단풍잎은 또 얼마나 얼굴을 붉혔는지요? / 몇 천의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는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시작된다는 걸 / 왜 이제야 알게 됐는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렇게 진득한 사랑 시작했으니…. / 모닥불처럼 훌훌 타오르고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 폭풍우처럼 밀려와 나무들을 뽑아버리는 그런 사랑도 말고 / 시골집 안방에 놓인 화롯불처럼 은근하고 뜨거운 사랑 / 막 쪄내서 콩고물에.. 더보기 명태 덕장에서 명태 덕장에서 강문숙 대설주의보 해제 되던 날, 대관령 덕장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백색의 골짜기 가장 높고 추운 곳 수천의 부처가 기립해 있었다. 마음 비웠다는 말 이보다 저 정직할 수 있을까. 물살이 키워온 내장 버리고 딱딱해진 혓바닥, 짜부라진 눈으로 기다리는 극락세상. 아직 멀었다, 멀었다, 쏟아지는 설법처럼 해풍에 젖은 햇살. 네 뼈에 살 입힌 곳 북해였다구? 그럼 동해는 네 지느러미 간질이며 놀던 곳으로 솟구쳐 오르고 싶었던 날들 푸른 수초 사이 미끄럽던 사랑 기억 속에 가두면 향처럼 피어오르는 이 삶의 비린내여. 이제 인간의 바다에서 해탈하리니 가지런히 싸리 쾌에 꿰인 채 황태,골태…… 바람태가 되면 또 어떠리. 一시집 `탁자 위의 사막'(문학세계사) 생태, 명태, 황태, 북어. 지금 비록 .. 더보기 오광수의 오솔길 3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죽음’은 벗어놓은 양말짝처럼 초라하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벗어놓고 맨발로 떠나는 마지막 길. 폭력과 광기의 생 앞에서 흔들리던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으로 평등해진다. .. 더보기 오광수의 오솔길 2 봄꽃 /김윤환/ 남산을 돌아 장충동 오는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본다 제 몸 달아올라 온 산을 다 태워도 제 향기 놓치지 않는 저 꽃의 몸부림 내 작은 가슴에 불붙어 오는 그리움도 저 산에 뿌려져 제 모습 온전히 드러내는 한바탕 몸부림이었으면 꼿꼿이 서서 붉은 채로 죽어가는 봄꽃이었으면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문학의 전당) 4월이 다 지나간다. 4월은 춥고 스산했으며 끝내 강원도 어디쯤에 폭설을 퍼부었다. 비바람 속에서 오체투지로 버티던 꽃들도 철늦은 꽃샘바람에 새파랗게 질렸다. ‘꼿꼿이 서서 붉은 채로 죽어가는 봄꽃’들이 짧지만 화려했던 봄날의 한때를 그리워하면서 초록 속으로 급하게 몸을 숨긴다. 때로 저 봄꽃들처럼 살다 가고싶다. 온몸 불살라 타오르다가 소리없이 지워지고 싶다. 하얗.. 더보기 오광수의 오솔길 1 기계 기계 -공광규 허겁지겁 출근하는 나를 앞집 개가 짖지도 않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저 인간…… 망가져서 달그락거리는…… 감가상각이 끝나가는…… 겨우 굴러가는 기계 아냐?” 개는 이렇게 생각을 더듬거리고 있나 보다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는 이 밀림의 누구인가 생산성과 헐떡이며 성교를 벌이고 있는 나는. -공광규시집 ‘소주병’(실천문학) 불혹이 넘은 시인의 시집에서 지친 어깨가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고 깨끗한 연애를 꿈꾸다가도/끝내는 튼튼한 가정을 위해 건배’(흘러가는 실내 포장마차)하고, ‘신혼의 첫 다짐처럼 하얗던 벽지도/때가 탈대로 타고/방구석에 무관심이 거미줄을 친’(휴일, 권태) 집에서 산다. ‘나는 그게 안 되고/아내는 그것도 못하냐며 핀잔을 주고/나는 더 쪼그라들고/아내는 이내 돌아눕는다.’ ..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