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시인)
지리산 노고단. 경향신문 사진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어느날 그대가 지리산 등성 어디쯤서 예쁜 반달곰과 딱 눈이 맞는다면…. 두말없이 마늘 몇 쪽 갖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녀석과 살림 한 번 차려 보시죠. 어느날 또 그대가 지리산 계곡 어디쯤서 날다람쥐 한 마리 만난다면 녀석과 쳇바퀴 굴리듯 한세상 돌고 도시든지요.
지리산 그 너른 품에서는 사람조차도 한 그루 나무입니다. 미물들 또한 모두 어엿한 사람입니다. 그곳에서는 네 편 내 편도 없이 그냥 어우러져 한세상 참 환하게 살아갑니다. 게서 제대로 지리산을 품고 싶다면 속세의 찌든 때는 잠시 벗어놓아야 합니다. 행여 물욕과 탐욕을 짊어지고 지리산에 간다면 성난 물줄기과 거센 비바람이 당신을 밀어낼 수도 있거든요.
대를 이은 반달곰 가족을 아무데서나 마주치고, 백년 묵은 산삼냄새로 그윽한 지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면 ‘세상살이 정 견디기 힘들때만’ 훌쩍 다녀오시지요. 게서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연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보듬어야 합니다.
'밥도 빵도 안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은 늙지 않는다 (0) | 2016.09.20 |
---|---|
호박 (0) | 2016.09.12 |
다시 겨울공화국에서 (0) | 2015.12.14 |
무미건조한 도시?, 서울의 시(詩) (0) | 2015.11.20 |
시를 사랑하는 딸에게 (0) | 2015.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