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경향신문 사진부
호박
오광수
밥솥에서 쪄 낸 호박잎에 보리밥을 올리고 강된장 한 숟가락 척 얹어서 입에 넣는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혀끝에 머물더니 사박사박 씹히면서 목넘김이 부드럽다. 전해오는 식감을 따라 마음밭은 한달음에 고향집 뒤꼍 장독대까지 내닫는다. 할머니가 심은 호박씨에 할아버지가 똥지게 몇 번 져 나르면 씩씩한 호박순들이 투덜거리며 올라왔다.
그땐 몰랐다. 냄새 나는 똥 속에서 뒹굴어야 새순이 돋고 열매가 맺힌다는 걸. 벌들이 아양 떨면서 노란 호박잎에 입맞춤하면 잘생긴 애호박 하나 뚝딱 만들어졌다. 호박잎 사이 숨바꼭질 하면서 용케도 살아남은 호박들은 노랗고 탐스런 호박으로 늙었다. 나중에 알았다. 별 일 없이 늙어간다는 게 호박에게도 쉽지 않다는 걸.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가 탐스런 여름날 할머니가 뚝뚝 호박순을 꺾어주면 할아버지가 담장에 지지대를 받쳐서 하늘길을 터주었다. 부지런한 녀석들은 땅거미가 지면 하늘로 올라가 달이 되었다. 이제 할머니는 별들을 솎아 견우직녀에게 주고 구름 반죽을 밀어 손수제비를 뜨신다. 손수제비에 애호박을 썰어 넣어야 하나가 된다는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할아버지라고 그냥 계실까. 별똥별을 만들어 지붕 위로 던지시고 볏짚을 태워 저녁하늘에 쥐불을 놓으신다. 요즘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그 분들이 떠난 길이 비로소 보인다.
올 겨울엔 늙은 호박씨 챙겨서 신문지에 잘 싸놔야겠다. 걱정이다. 호박씨 까면서 버텨온 비루한 청춘이 곰삭아 늙어서도 다 퍼주는 호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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